홍영림 여론조사전문기자

'신고리 5·6호기 백지화 시민행동'은 원전 공론 조사에 참여할 목적으로 두 달 전 급조된 '맞춤형' 시민단체다. 시민행동은 공식 블로그에서 '이번 공론화는 시민들의 참여로 에너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발족했다'고 했다.

시민행동은 세(勢) 과시를 위해 917개 단체나 끌어모았다. 2014년에 756개 단체가 모였던 '세월호국민대책회의'보다 규모가 크다. 세월호국민대책회의에 참여했던 단체 가운데 24%인 179개는 시민행동에 다시 이름을 올렸다. 환경운동연합과 에너지정의행동뿐 아니라 참여연대, 민주노총, 전교조,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전국빈민연합 등 환경·에너지와 무관한 단체들도 대거 포함됐다. 심지어 법원에서 이적(利敵) 단체 판결을 받은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민족자주평화통일중앙회의, 우리민족연방제통일추진회의 등도 명단에 있다. 국민의 혈세로 월급을 받는 원내 정당인 정의당과 새민중정당 등도 참여했다.

하지만 신고리 5·6호기 공론화위원회는 이해 당사자의 의견을 수렴하는 공식 산하 기구인 '소통협의회'의 원전 반대 측 대표로 시민행동을 선정했다. 원전 찬성 측 대표는 원자력산업회의와 한국수력원자력 관계자 등이다. 원전 찬반 대표들은 공론화의 핵심인 시민 참여단 478명의 학습과 토의 등 숙의(熟議)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막중한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시민행동은 "자료집 작성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며 "공론 조사를 보이콧하겠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원전 찬반 단체가 각자 마음대로 자료집을 만들면 정보가 왜곡될 수 있지만 시민행동은 공론 조사를 유리하게 끌고 가려고 어깃장을 놓은 것이다.

'안전한 사회를 위한 신고리5·6호기 백지화 시민행동'이 9월9일 울산 남구 롯데백화점 광장에서 전국 탈핵대회를 열고 있다.

시민행동은 "정부 출연기관 연구원은 원전 찬성 측 공론화 활동을 중단해야 한다"는 요구도 했다. 원전 지식이 해박한 전문가의 참여를 막으려는 시도였지만 정부는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앞서 시민행동은 2만명 대상 1차 전화 조사 과정에선 회원들에게 소셜 미디어로 "전화가 오면 '공사 중단'을 반드시 선택하라"고 지침을 내렸다. 선거 때 후보자가 공천 여론조사에 지지자를 조직적으로 동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래도 공론화위는 "조직적 여론 왜곡 시도를 자제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공론 조사가 시민단체 쪽으로 치우친 '기울어진 운동장'이란 말이 나올 만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신고리 원전 공론 조사에 대해 "어떤 결론이 나오든 존중하겠다"며 "국가적 갈등 과제를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해결하는 시범 사례가 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도 국가 정책과 관련한 공론 조사를 한다면 한·미 FTA, 광우병, 제주 해군기지, 세월호, 탈원전 등 주요 이슈 때마다 단골로 등장했던 '그때 그 단체들'이 또다시 맞춤형으로 뭉쳐서 목청을 높일 것이다. 시민단체는 양보와 타협보다는 목표를 쟁취(爭取)하기 위한 조직이다. 그런 시민단체에 휘둘리는 공론 조사는 갈등의 해결이 아니라 갈등을 증폭시키는 흉기(凶器)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