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우기 위해, 오늘도 나는 어디에선가 서성이고 있다

  • 백가흠·소설가

    입력 : 2017.09.27 03:05 | 수정 : 2017.09.27 07:52

    조용한 여운의 도시, 노리치

    여행을 다녀오면 후유증이 퍽 길게 우리 삶의 언저리를 맴돈다. 몸은 돌아왔는데 아직도 무엇은 돌아오지 못했다는 의미다. 현재의 삶 일부분이 아직 그곳에 남아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의 나는 아직도 시공간의 불일치 속에 놓여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그 후유증을 얻기 위해 우리는 어딘가로 끝없이 떠나고 돌아온다. 그 어딘가에 남겨두고 온 터럭 같이 미미해진 기억과 삶의 일부분이 때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삶을 지탱해준다.

    지난 여름, 영국 노리치(Norwich)를 다녀왔다. 런던 리버풀에서 기차로 2시간을 달리면 등장하는 북동쪽, 인구 13만 명 수준의 중소도시. 그곳에서 여름 내내 여름 같지 않은 여름을 맛보았다. 자주 비가 내렸고, 햇빛 짱짱한 좋은 날씨에도 바람이 선선했다. 기이한 느낌이었다. 여름이니까 반팔 옷을 입긴 했는데 추웠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도 그렇게 느껴지는 도시. 영국은 바람이 찬 곳이구나, 매번 떠올리게 했다.

    심심하고 무료해서 훌륭한 여행이었다. 노리치에서 지내는 두 달여 동안 오전엔 영어학원을 다녔다. 처음엔 여러 외국인 무리에서 자주 쑥스러웠다. 다행히 선생님이었던 할머니 산드라는 차가운 영국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 곳 사람들이 전반적으로 그랬다. 친절하고 한국에 관심이 많고… 그래서 시간이 조금 지나자 시간을 건너 뛰어 30년 전 전북 익산의 어느 중학교 교실에 앉아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도서관에 갔다. 2001년 개관한 밀레니엄 도서관은 도시의 규모를 잊게 하는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이었다. 그 안에 앉아있으면 참으로 근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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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백가흠

    도서관 옆에 붙어있는 레스토랑 ‘더 포럼’에 자주 갔는데, 거기서 에일(Ale) 맥주를 마시고, 특별할 것 없는 튀김 요리를 먹으며 한없이 늘어지곤 했다. 오후 내내 도서관에 앉아 뭔가를 쓰면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12세기에 지어진 노리치 대성당이나 일종의 재래시장인 노리치 시장을 둘러보다가, 그 뒤로 보이는 노리치 성을 내다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와 광장에서 펼쳐지는 공연을 우두커니 바라보기도 했다. 아는 영어 단어 하나로 시작되는 눈치와 짐작이야말로 만국의 공통 언어가 분명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으나, 딱히 헷갈리지도 않았다. 사람 사는 게 영국이나 한국이나 비슷비슷했다.

    노리치의 하늘은 오후 9시는 돼야 어둑어둑해졌다. 저녁을 먹고 자전거를 몰아 교외로 나가곤 했다. 어디가 어딘지 제대로 알 리 없었으나 신나게 달렸다. 너무 멀리 왔나 싶으면 방향을 돌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매번 내 생각과는 다른 길이 등장했다. 길을 잃는다는 건 조금 겁나는 일이었지만 익숙해지자 오히려 낯선 풍경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가끔 사무적인 일로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이메일로 의견을 나눠야할 일이 있었는데, 잊고 있던 내 터전의 경직된 부분을 마주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노리치에 있는 내내 나의 마음은 정말이지 고요했다고 할 수 있다. 이대로 쭉 여행의 평온함이 깨지지 않길 바랄만큼.

    한 달쯤 지나자 이제는 밤에도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담력이 생겼다. 밤바람에 섞여 상념은 날아갔다. 그렇게 페달을 구르다 보니 어느새 한국이었다. 나는 내 아파트에 도착해있었던 것이다. 시간은 계속 앞으로 나아가지만, 인간은 기억을 통해 시간을 과거로 돌릴 수 있다. 여행의 후유증은 그런 것이다. 시간이 거꾸로, 과거로 흐른다. 어제에서 열흘 전으로, 그리고 몇 년 전으로, 무심코 지나쳤던 사람의 풍경이 불쑥 돌아온다.

    아직도 노리치의 맑고 조용한 공기가 곳곳에서 감지된다. 이만하면 여행의 외상(外傷)이 깊다.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중얼거린다. 곰곰 생각해보면 노리치의 생활과 사람과 풍경이 특별했던가, 이국의 바람이 현재를 잊게 할 만큼 굉장했던가,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9월, 여행에서 돌아온 후 정신없고 바쁜 생활이 바로 시작됐는데, 여전히 노리치의 거리가 아주 자주, 내가 사는 아파트 25층 베란다 밖으로 펼쳐지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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