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1109] 過客 생활

    입력 : 2017.09.18 03:14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최모 시인이 서울의 어느 호텔에 1년간 홍보를 해줄 테니 호텔 방에서 살게 해 달라고 제안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월세방살이를 하는 경제적 궁핍에다가 시인 특유의 낭만적 사고가 결합해 나온 시도로 보인다. 중국의 두보(杜甫)는 말년에 돈 떨어지고 중풍까지 걸린 상태로 세상을 떠돌아다녔다. 그냥 떠돈 게 아니고 처자식까지 배에다 태우고 강과 호수를 떠돌았다. 유리표박(流離漂泊)하면서도 악양루에 올라가 동정호를 바라보며 '건곤일야부(乾坤日夜浮·하늘과 땅은 밤낮으로 떠 있네)'라는 절창을 남겼다.

    효봉 선사. /조선일보 DB
    김삿갓이 직업을 갖지 않고 방랑 생활을 하면서도 숙식을 해결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시(詩)를 잘 지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는 시를 잘 지으면 대접받을 수 있는 사회였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하면 풍수(風水)에 대한 실력이다. 터를 잘 보면 대접을 받았다. 조선 후기 밥 먹는 집의 사랑채에는 과객이 득실거렸는데, 대부분 풍수를 이야기하는 지관(地官)들이었다. 유교적 세계관에서 볼 때 명당을 잡는 노하우인 풍수도참(風水圖讖)은 성공과 실패를 좌우하는 종교였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때 판사 하다가 머리 깎고 스님이 된 효봉(曉峰) 선사는 판사 때려치우고 법복을 팔아 가위와 엿판을 샀다고 전해진다. 가위를 쩔그렁거리는 엿장수를 하면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다가 금강산에 들어가 스승을 만났다. 효봉은 말년에 통영 미래사(彌來寺)에 머물 때에도 그 엿장수 시절의 검은색 무쇠 가위를 방 안의 벽에다 걸어놓고 있었다. 효봉이 생각할 때 자급자족하면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방법은 엿장수가 되는 것이었다.

    내가 아는 석명 선생은 고교 중퇴하고 집에서 요가를 하다가 20대 중반 인도에 갔다. 델리 공항에 도착했을 때 돈이라고는 주머니에 고작 20달러가 있었다. 피로를 풀 겸 길바닥에서 담요를 깔고 요가 동작을 하고 있으니까 지나가던 외국인들이 "티치 미(teach me)" 하면서 요가를 가르쳐 달라고 하였다. 요가를 가르치고 침술(針術·acupuncture)로 경비를 벌면서 인도 전역을 6년 동안 방랑하였다. 나는 글을 쓰는 '칼럼술'(術)과 강연을 하는 구술(口述)을 장착하고 전국의 명승지와 고택을 유람하는 술사(術士) 팔자이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