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현우의 팝 컬처]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입력 : 2017.09.14 03:12

    1970년대 어릴 때 쓴 일기장은 꺼내기만 하면 읽을 수 있는데
    2000년대 플로피 디스크는 기기 단종으로 열 수도 없어
    이 가을, 딸에게 편지를 써야겠다… 편지지에 손으로 꾹꾹 눌러서…

    한현우 주말뉴스부장
    한현우 주말뉴스부장

    오래전 써둔 원고 뭉치를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는다. 새로 산 컴퓨터에는 당연히 없고 외장 하드와 노트북에도 없다. 집과 회사에 있는 USB를 죄 뒤졌는데도 없다. 아무래도 먹통이 돼서 복구 불능 상태인 옛 컴퓨터 하드디스크에 있는 것 같다. 그 디지털 저장 장치가 먹통이 되면서 그 안에 든 아이의 어릴 적 사진 몇 년치도 홀랑 날아가 버렸다. 그때 다짐하길 '중요한 사진은 인화해야겠다'가 아니라 '외장 하드를 사서 백업해 둬야겠다'고 했다.

    원고 파일을 찾는다고 한바탕 난리를 피우다가 일기장이 가득 든 상자를 발견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대학 시절까지 썼던 일기장이 고스란히 보관돼 있다. 한참을 주저앉아 옛 일기를 읽었다. 혼자 킬킬대다가 고교 때 쓴 일기를 보면서부터 얼굴이 벌게졌다. 이제 이것들을 버려야 해. 눈 뜨고 읽을 수가 없어. 쓰레기로 버릴 순 없고 다 태워야겠어. 혼잣말을 하다가 예전에 편지를 태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때부터 모았던 편지를 몽땅 아버지 시골집에 가져갔다. 고교 때 좋아했던 여자아이에게서 받은 편지부터 불 속에 집어넣고, 그 아이에게 썼다가 차마 부치지 못한 나의 편지는 갈기갈기 찢어 태워버렸다. 그러다가 지금도 자주 만나는 고교 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발견했다. 스무 살도 안 된 것들이 인생을 논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 운운하고 있었다. 다음번 만날 때 가져가서 놀려먹을 심산으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때 깨달았다. 내가 지금 태우고 있는 것이 편지가 아니라 추억이었구나. 불을 끄고 편지를 챙겨 집으로 되가져왔다. 그 일을 떠올리며 일기장 뭉치를 상자에 담아 서랍 깊은 곳에 밀어 넣었다.

    뭐든지 잘 버리지 못해 수습기자 시절부터 지금까지 취재 수첩을 한 권도 버리지 않고 모아오고 있다. 언젠가 책을 쓰게 되면 그 수첩들이 좋은 자료가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도 있다. 마찬가지로 내가 쓴 기사도 빠짐없이 모으고 있는데 이것은 수첩이나 일기장 형태가 아니라 디지털 파일이다. 이것이 골치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이 파일들 상당수가 3.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담겨 있다. 당시에는 그 방식이 가장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보관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976년 개발된 5.25인치 플로피 디스크가 10년 만에 3.5인치 디스크에 자리를 내줬듯이, 3.5인치 디스크는 금세 CD롬으로 대체됐다. 이제는 CD롬도 주변에서 볼 수 없다. 아직은 USB 스틱을 많이 쓰고 있지만 이미 가상공간에 데이터를 저장하는 클라우드 방식이 널리 쓰이고 있다. 컴퓨터 하드디스크도 SSD라는 작고 효율적인 장치로 바뀌고 있다.

    책상 서랍 하나를 메운 플로피 디스크들과 인터뷰를 녹음한 마이크로 카세트테이프들을 보면서 그것을 재생할 수 있는 장치가 내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1970년대에 쓴 일기장은 책장에서 꺼내기만 하면 바로 읽을 수 있는데 2000년대 들어 쓴 기사는 바로 꺼내서 읽을 수 없다. 플로피 디스크를 읽으려면 이젠 단종된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구해야 한다. 인터넷을 뒤져야 할 것이고 용산전자상가에 가야 할 수도 있다.

    그런 장치를 컴퓨터에 케이블로 연결한 뒤 전원을 켜고 폴더를 찾아 들어가야 한다. 케이블도 12핀이니 USB니 C타입이니 하며 계속 바뀐다. 유일하게 다행인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이크로소프트가 망하지 않아 워드프로세서로 작성한 파일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놈의 컴퓨터가 마지막 순간에 '치명적인 오류가 발생했습니다' 어쩌고 하며 읽기를 거부할 수도 있으니, 내 기록의 운명이 몽땅 기계 덩어리의 처분에 달려있는 셈이다.

    파일을 찾는다고 컴퓨터와 씨름하며 이런저런 생각 하다 김민기 노래 '가을 편지'를 듣고 싶어졌다. 고은 시에 김민기가 곡을 붙인 이 노래를 수많은 가수가 불렀으나 역시 원곡이 가장 좋다. 나일론 기타 줄을 한 올 한 올 퉁겨 전주를 연주하다가 그보다 한 옥타브 낮은 멜로디로 노래가 시작된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에서 '여자'를 '여ᅀᆞ'로 발음하는 젊은 김민기 창법도 흥미롭다.

    가을엔 편지를 한 통 써야겠다. 딸한테 쓰는 게 좋을 것 같다. 컴퓨터로 쓰지 않고 카톡으로 보내지 않는 진짜 편지를 말이다. 문구점에서 편지지를 사다가 손으로 꾹꾹 눌러써야겠다. 우체국에서 우표를 붙여 보낸 뒤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를 들으면 더 좋을 것이다. 카톡만 받다가 손 편지를 받은 딸의 얼굴이 벌써 떠오른다. 꽤 반가운 가을 선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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