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희망 고문

    입력 : 2017.09.13 03:16

    유대교 랍비가 고리대금업을 했다는 죄로 감옥에 갇힌다. 절망에 빠져 있던 그가 어느 날 탈출구를 발견하고는 희망에 부푼다. 마침내 탈옥에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듯 나타난 종교재판소 소장에게 붙잡히고 만다. 그 순간을 작가는 이렇게 묘사한다. '이 운명적인 저녁의 매 순간이 다 예정된 고문(拷問)이었다. 희망이란 이름의 고문.' 19세기 프랑스 작가 빌리에 드릴라당이 쓴 '희망 고문'이란 소설에 나오는 구절이다.

    ▶비정규직 교사 4만6000명의 정규직 전환이 무산됐다. 전국기간제교사연합회가 "정부의 '비정규직 제로(0)'는 허울뿐인 정책이고 전국 기간제 교사들을 농락한 행위"라고 분노에 찬 성명을 냈다. 어차피 되지도 않을 일이었는데 정부가 기대만 부풀린 결과 아니냐는 불만이 쏟아진다. 바로 '희망 고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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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량진 공시족(公試族)의 희망 고문 강도도 갈수록 심해지는 듯하다. 새 정부는 공무원 숫자를 늘려 청년 실업난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그 뒤로 청년 체감 실업률이 낮아지기는커녕 더 높아지고 있다. 7월 청년 실업률은 9.3%인데 취업 준비생을 포함한 체감 청년 실업률은 무려 22.6%다.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 준비에 뛰어드는 공시족이 늘어난 탓이다. 하반기에 7·9급 공무원을 429명 뽑는데 10만6186명이 응시했다. 9급 공무원 경쟁률이 무려 301.9대1이다. 사상 최고치다. 공무원 숫자 늘어난 만큼 합격의 '희망'을 이룬 사람보다, 기회의 문이 넓어진 걸로 착각하고 우르르 몰렸다 낙방의 '고문'을 당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아진 현실이다.

    ▶베트남 전쟁 때 미군 장교 짐 스톡데일은 8년간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다 극적으로 살아났다. 스톡데일의 증언에 따르면 포로수용소에서 가장 먼저 죽음에 이른 사람은 비관론자가 아니었다. '크리스마스 때 풀려날 것'이라고 믿었다가 크리스마스가 그냥 지나고, '그럼 부활절 때 풀려날 것'이라고 다시 기대했는데 또 좌절을 맛보는 식으로 낙담을 거듭한 사람이 더 먼저 목숨을 잃더라는 것이다. 엄혹한 현실은 인정하지 않고 막연한 희망에만 기대를 걸었다 더 큰 실패를 초래하는 현상을 '스톡데일 패러독스'라고 부른다. 희망의 역설이다.

    ▶새 정부는 청년 실업, 저임금, 비정규직 문제를 일거에 다 해결해줄 것처럼 얘기해 국민 기대치를 잔뜩 부풀려 놨다. 허황한 정치 약속은 남발해서는 안 된다. 부풀려진 희망이 부도날 때 절망의 골은 갑절로 깊어진다. 하지만 새 정부의 희망 고문은 기간제 교사 사태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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