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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한 순수한 살인의 본능…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 글/구성 : 뉴스콘텐츠팀 이수진

    입력 : 2017.09.12 15:14

    ※ 이 글은 중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너무 잘 읽히는' 소설,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살인자의 기억법'은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갖고 있다. 30년 동안 꾸준히 살인을 해 온 연쇄살인마가 나이 70이 되자마자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었다. 그런데 또 다른 연쇄살인마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 후 딸을 지키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김영하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순전히 이 흥미로운 설정에 끌렸고, 서점에서 산 그날 다 읽어 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너무 잘 읽히는' 이 소설은 4년 후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재구성됐다. 원신연 감독의 말처럼 영화는 원작과 가장 닮아 있으면서 또 가장 멀었다. 뭐가 같고 뭐가 다를까. 한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을 만큼 짧은 원작에는 한 세계가 흔적도 없이 소멸하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담겼다. 어쩔 수 없이 이 영화는 원작과 비교당해야 할 운명을 타고 났다.

    원작의 김병수를 실제로 보는 듯한 느낌

    이 괴작의 흔적은 그 얼룩이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채 몇 년 동안 나의 내면 어딘가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늙었다기보다 말라비틀어진 것 같은 설경구의 강렬한 스틸샷을 보자마자 책을 읽으며 느꼈던 까마득함이 다시 밀려왔다. 영화 속 김병수에게는 어떤 일이 생겼을까.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스틸샷

    책을 읽은 독자라면 김병수를 연기한 설경구의 외모는 굉장히 당연하게 느껴질 것 같다. 활자만 갖고 상상했던 김병수가 거의 그대로 스크린에 재현되고 있었다. '불한당'에서 '쓰리피스'의 꽉 끼는 수트를 입고 '빳빳하게 펴졌던' 설경구가 다시 이 영화에서 구겨진 것이다. 그의 필모그래피 사상 가장 쭈글쭈글하게.

    설경구, 팬덤 얻고 '갓경구'가 되었다

    이미 강렬한 캐릭터를 여러 번 연기한 설경구가 더 보여줄 색다른 캐릭터가 또 있을까 싶었지만 김병수라는 캐릭터는 확실히 특별하고 강렬했다. 망각과 기억과 현재, 심지어 망상까지도 오가는 김병수의 변화무쌍한 감정 상태를 설경구는 매우 설득력 있게 연기하면서 또 한번 본인의 배우 커리어를 단단하게 다졌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의 '설경구 미친 열연 영상'

    설경구라는 배우는, 자신의 연기를 '복제' 한다는 의심을 받을 무렵 '불한당'의 순애보로 뜻밖의 팬덤을 얻었고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갓경구'라는 닉네임을 자연스럽게 달기 시작했다. 아직도 설경구의 연기는 더 볼 게 많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다시 상기시킨 것이다.

    김남길의 민태주가 주는 특별한 긴장감

    그리고 김남길이 연기한 민태주 캐릭터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김남길은 '기름기를 쫙 뺀' 대배우의 열연을 마주하고도 전혀 주눅들지 않고 능글능글하게 악역을 수행한다. 영화 후반부까지 민태주라는 캐릭터에 대해서 관객들이 끝까지 의구심을 갖게 하는 힘은 김남길의 세상 나른한 말투와 능청스러움에 있다. 민태주의 이 태연함은 '살인자의 기억법'이 끝까지 스릴러로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스틸샷

    영화는 원작과 어떻게 다른가

    자, 그래서 영화는 원작과 어디가 같고 어디가 다른가. 결론만 말하자면 원작과 영화는 손 잡고 시작을 함께 하지만, 목적지는 완전히 다른 길로 갈린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영화에는 김병수도 있고 은희도 있으며 박주태(민태주)도 있으나 이 인물들의 말로는 서로 아주 다르다.

    원작은 해삼처럼 너덜너덜한 김병수의 머리(뇌)에서 벌어지는 '소멸'과의 사투를 그렸다. 무자비하다 느껴질 정도로 짧은 단락들이 쏟아지듯이 지면에 나열되고 그것을 독자들은 정신 없이 쫓는다. 그러다 보면 김병수의 세계는 공(空)이 된다. 원작에서는 그 생생한 파괴의 과정을 세세하고 실감나게 느끼게 된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스틸샷

    김병수는 무엇과 그렇게 사투를 벌이는가

    그러니까 원작에서 벌어지는 치열한 전쟁은 결국 내부, 안에서 벌어지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안에서만 벌어진 것 같았던 전쟁이 밖으로까지 확장해 눈에 보이는 적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 능구렁이 라이벌과 혈투를 벌인다. 영화의 김병수는 민태주와 결국 만나 일전을 벌인다. 김병수에게 민태주는 딸을 죽일지도 모르는 연쇄살인마이자 동종업계(?)에선 유일무이한 강력 라이벌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곱씹어보면 살인마로서 김병수의 라이벌 민태주는 밖에 있지만 진짜 그의 라이벌은 김병수 내면에 얼룩처럼 남아 있는 살인의 쾌락·본능이다. 그것이 영화에서 민태주로 현신해 김병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결국 영화의 김병수는 이성이 사라지는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살인 본능과 싸워야 했고 그것은 곧 민태주와의 싸움이다. 김병수의 살인본능은 아류를 용납하지 않았고 살인마스터는 자기 자신뿐이여야 했을 것이다.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스틸샷

    연쇄살인마를 다루는 두 가지 방법

    책 '살인자의 기억법'은 모든 기억과 감정과 본능조차 사라진 '공(空)'을 향해 질주하는 이야기다. 김병수의 세계는 점이 되고 그 점마저 사라진다. 하지만 영화는 기억이 사라지는 자리를 은희의 엄마가, 누나의 환상이, 우는 어린 은희가 들어찼다가 결국은 살인의 본능만이 온전히 다 차지하게 되는 이야기다. 민태주는 그러한 과정을 앞당기는 촉매가 되었다.

    책에서는 무기력하게 소멸한 김병수가 영화에서는 또 다른 악마로 부활했다. 연쇄살인마를 다루는 두 가지 방법. 어느 쪽이 더 끌리시는지. 선택은 역시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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