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라는 참혹한 역사의 희생자와 만나게 돼 가슴이 아픕니다. 특히 전쟁에서 희생당한 여성들을 세계가 알아야겠습니다. 여러분은 인권을 실현하고 있으며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위한 역사를 쓰고 있습니다."
게르하르트 슈뢰더(73) 전 독일 총리가 11일 위안부 할머니들이 사는 경기 광주시 퇴촌면 '나눔의 집'에 찾아왔다. 자서전 출간을 맞아 방한한 그는 위안부 할머니들을 만나 위로하고 싶어 한 시간 남짓 따로 시간을 냈다고 한다.
슈뢰더 전 총리의 모국인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때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태인 대학살)를 일으켰다. 독일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전 세계에 홀로코스트에 대해 반성하고 사죄하는 모습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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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3시 나눔의 집에 도착한 슈뢰더 전 총리는 입구에 있는 고인 5명의 흉상을 숙연한 모습으로 마주했다. "여기 있는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위안부 피해를 공개적으로 처음 알리신 분"이라는 안신권 소장의 설명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댕기머리에 치마 저고리 차림인 소녀상의 손을 어루만졌다. 위안부 희생자들을 모신 추모비에 꽃을 바치고 묵념을 했으며, 일본군위안부 역사관도 둘러봤다.
슈뢰더 전 총리는 나눔의 집에서 살고 있는 할머니 9명 가운데 4명을 만나 얘기도 나눴다. 모두 90대인 할머니들은 "먼 길을 어렵게 와 주셔서 고맙다"며 쭈글쭈글한 손을 내밀어 맞잡았다. 이용수(90) 할머니는 소녀상 배지를 가슴에 달아줬고, 보행기에 의지한 이옥선(91) 할머니는 "우리가 죽기 전에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도록 도와 달라"며 끼고 있던 '기억 팔찌'를 채워줬다. 슈뢰더 전 총리의 눈도 촉촉해졌다.
그는 "여러분이 원하는 것은 복수나 증오가 아니라 일본이 과거를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다. 살아계실 때 그런 일이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며 위로했다. 또 '안네의 일기' 주인공 안네 프랑크(1929~1945)의 사진 액자를 전달했다. 그는 "홀로코스트와는 다르지만 여러분 개인이 당한 희생과 고통은 그에 못지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또 "작은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며 1000만원이 든 후원금 봉투도 건넸다. 나눔의 집 할머니들은 답례로 김순덕(1921~2004) 할머니가 그린 '끌려감' 등이 실린 책자와 소녀상 모형을 전달했다.
슈뢰더 전 총리는 반성과 사과를 외면하는 일본의 태도에 대해 비판했다. 그는 "일본이 이런 폭력을 겪은 피해 여성들에게 사과할 수 있다면 역사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갖고 있다고 하겠지만, 아직 그런 용기를 갖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또 "위안부 피해 여성들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자는 제안이 있다고 들었는데, 충분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적극 지지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큰 고통을 당한 분들을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는 글귀를 방명록에 남긴 슈뢰더 전 총리는 할머니들의 손을 잡고 짧은 만남을 아쉬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