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의 마지막 임무

    입력 : 2017.09.11 03:15

    대단한 용기 지닌 정의용 실장
    외교장관 비서였던 12·12 때 장관을 총격전 뚫고 피신시켜
    여당의원 시절 盧대통령 비판도
    그 氣槪로 국가 미래 바라보고 文대통령에게 방향전환 直言해야

    이하원 논설위원
    이하원 논설위원

    1979년 12·12 사태 때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외무부 장관 비서관이었다. 한남동 외무부 장관 관저와 인접한 육군 참모총장 공관에서 총격전이 벌어졌다. 무장군인들이 오가며 총 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긴박한 상황이 계속됐다.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정 실장은 박동진 외무장관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야겠다고 판단했다. 박 장관의 손을 이끌어 관저 뒷산을 넘어 옥수동 방향으로 '탈출'시켰다. 그가 박 장관을 운전석 바로 뒤에 앉게 한 후 자동차로 빠져나왔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똑똑한 외교관 정의용'의 기지(機智)와 상관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는 일화는 외교부에 오랫동안 회자돼 왔다.

    직언(直言)할 게 있으면 서슴지 않는 모습으로도 화제가 됐다. 정 실장은 주(駐) 제네바 대사 역임 후, 열린우리당 비례대표로 국회에 진출했다. 당시 여당 의원이면서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해 청와대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노 대통령이 2006년 6월 해양경찰관을 초청한 오찬 모임에서 묘한 발언을 한 직후였다. "우리는 적어도 일본이 도발하지 못할 정도의 국방력을 갖고 있다"는 발언이 노 대통령에게서 나왔다. 그러자 정 실장이 국회 통외통위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대통령의) 그런 언급이 과연 상대국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겠느냐 하는 데 대한 깊은 생각이 뒤따랐으면 좋겠다." 북한을 옹호하는 것처럼 들리는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서도 "우리 정책에 대한 신뢰가 훼손된다"고 작심 발언을 했다. 열린우리당 주변의 소위 '노빠'들이 이를 문제 삼았다. 요즘 여권에서 유행하는 말로 하루아침에 적폐세력이 됐다. 그래도 그는 할 얘기를 했다며 태연했다.

    이런 경력 때문에 지난 5월 신정부 출범 후, 외교부 안팎에서는 정 실장에 대해 기대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외교관 시절을 주로 통상분야에서 보냈지만, 강단(剛斷) 있는 외교력을 보여줄 것으로 내다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의 대학 1년 선배로 호형호제(呼兄呼弟) 하는 사이인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나 최근 정 실장의 역할에 대해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들이 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1일 밤 청와대 관저 소회의실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통화하기 앞서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청와대 제공
    한반도를 둘러싼 모든 나라가 '코리아 패싱'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안보위기에서 그의 역할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별다른 전략 없이 북한이 도발하면 국가안전보장회의 (NSC) 상임위원회를 주재하는 것이 전부"라는 혹평이 들린다. 청와대가 임종석 비서실장 '원톱' 체제로 운영되면서 그가 과거 외교·안보수석이 하던 일만 하고 있다는 비판도 증가했다.

    국가안보실장은 말 그대로 대한민국의 안보와 관련된 모든 것을 총괄하며 책임지는 자리다. 전(前) 정부에서 비서실장 밑에 있던 외교·안보수석실을 휘하에 두고, 위기관리센터도 보강했다. 과거보다 하드웨어는 모두 정비됐는데, 위기의 순간에 막상 소프트웨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지는 셈이다.

    북한이 1년 만에 핵폭발 위력을 5배 가까이 끌어올린 9·3 사태를 계기로 정 실장은 이젠 달라져야 한다. 낭만적 통일 운동을 벌였던 80년대 학생운동권 그룹은 청와대 입성 후에도 북한 핵·미사일 문제를 대화로 풀 수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 앞으로 어떤 형태로든 남북 및 미북 대화가 재개되면 이를 계기로 마치 북한 문제가 풀려가는 것처럼 분위기를 잡아갈 가능성이 크다.

    정부 내에서 이런 문제점을 지적하고, 안보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방향을 제시할 위치에 있는 사람은 사실상 정 실장 한 명뿐이다. 그에겐 나라의 미래를 내다보고 전술 핵무기 재배치부터 자체 핵무장까지 과감하게 검토할 책무가 있다. 파열음이 막 터져나오려고 하는 한·미 동맹을 굳건히 하는 것도 무엇보다 큰 과제다. 여당 의원이면서도 대통령을 비판했던 자세로 문 대통령에게 과감한 '방향 전환'을 진언(進言)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평생을 공직에서 보낸 정 실장이 마지막으로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광화문 관가 주변에 많은 것 같다.


    [인물정보]
    靑 "정의용-맥마스터 20분간 긴급 통화…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