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죄와 벌, 사형과 참회 이 염주에 있소이다

    입력 : 2017.09.09 03:02 | 수정 : 2017.09.09 06:33

    [송혜진 기자의 느낌] 교도소 찾아 500여명에 法問 '사형수의 대부' 삼중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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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중 스님 손에 염주 두 개가 들려 있다. 하나는 1989년 처형된 사형수 고금석이 살아생전 금강경 법문을 알알이 새긴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은 석방된 최모씨가 사형수 시절 염주 알에 ‘필귀가(必歸家·반드시 집에 돌아간다는 뜻)’라고 써넣은 것이다. 경기 안성 영평사에서 만난 삼중 스님은 “죽은 사형수와 살아남은 사형수, 그 둘의 갈림길을 생각하며 염주 알을 굴려본다”고 했다./이태경 기자
    "스님, 제발 웃어주세요. 그래야 제 맘도 편합니다."

    웃어달라는 말에 도리어 눈물이 터졌다. 1989년 8월 4일 대구교도소 사형집행실에서 스님 박삼중은 결국 그렇게 엉엉 소리 내서 울고 말았다. 사형수 고금석(26) 유언을 들은 직후였다. 고금석은 조직폭력단 '서울목포파' 멤버였다. 1986년 서울 역삼동 서진룸살롱 살인사건 때 '맘보파' 행동대장 조원섭을 비롯한 네 명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죄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고금석은 감옥에서 사형수 법문(法問)을 맡은 삼중 스님을 만나면서 참회한다. 다른 재소자가 출소할 때면 아껴 모아뒀던 영치금을 내밀며 "잘 살아달라"고 했고, 강원 정선에 있는 백전초등학교 용소분교 어린이가 '바다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자 삼중 스님에게 "그 학교 아이들을 꼭 바다에 데려가 달라"고 하기도 했다.

    삼중 스님은 그 부탁을 듣고 1989년 여름 방학에 아이들을 부산 해운대에 데려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사형 집행 소식을 들은 건 아이들과 바다에 가기 열흘 전이었다. 사형집행실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삼중 스님에게 고금석은 오히려 웃어 보였다. "먼저 가겠습니다. 아이들을 부탁합니다." 고금석이 남긴 전 재산 20만원은 용소분교에 전해졌고 학교엔 그의 법명 '금송(金松)'을 딴 교실이 남았다.

    삼중(三中·75) 스님은 평생 사형수 법문을 해온 사람이다. 지금껏 그가 만난 사형수만 500여 명에 이른다. 일본 교도소에 갇힌 우리나라 죄수에게도 관심이 많아, 재일동포 김희로(훗날 권희로로 개명)가 1999년 석방돼 우리나라로 돌아오기까지 10년간 끈질기게 구명운동을 펼쳤고, 안중근 의사 유해와 유묵(遺墨)을 찾는 데도 반평생을 썼다. 1993년 일본에서 안중근 의사 유묵 '경천(敬天)'을 찾아내 이를 소장하다 2014년 8월 서울 잠원동 성당에 넘기기도 했다. '경천'은 이제 서울대교구 소장품이다. 오늘부터 70일 동안 이탈리아 로마교황청 바티칸 박물관에도 전시된다.

    지난 5일 경기 안성 영평사에서 만난 삼중 스님은 "평생 사형수에게 인생을 뜨겁게 배워온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이젠 역사상 가장 훌륭했던 사형수 안중근 의사 덕분에 내가 손수 찾아낸 유묵이 바티칸 박물관에 걸리는 감격까지 맛보게 됐다"고 했다.

    그는 5년 전부터 신부전증을 앓고 있다. 매주 월·수·금요일 혈액투석을 받지 않으면 몸이 버텨내질 못한다. 그런데도 그는 "사형수와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라면 하루 종일 말할 수도 있다"고 했다. 눈빛이 형형했다. 귀에는 보청기가 끼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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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경 기자
    罪人을 사랑한 스님

    ―요즘도 서울구치소에 자주 가신다면서요.

    "그게 내 일이니까요. 당장 죽을 것처럼 아프다가도 그곳에 가면 힘이 납니다."

    ―왜 하필 죄인, 그중에서도 사형수를 만나십니까.

    "그들에게서 늘 인생을 배우니까요. 교도소를 두고 속된 말로 '학교'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내가 보기엔 그곳보다 멋진 학교, 수행 현장도 없어요. 사형수는 언제 세상을 떠날지 알 수 없는 죄인 아닙니까. 그런데도 나보다 더 자기 관리를 잘해요. 때론 그들이 성직자 같죠."

    삼중 스님은 1967년 대구교도소에서 법문을 시작했다. 해인사에 몸담고 있던 시절이었다. 우연히 들른 교도소였다. 교도소장은 "재소자 중에서도 기독교 신자들은 목사님이나 신부님을 만날 기회가 많은데, 정작 불교 신자들은 스님 만나기가 어렵다. 교도소 출입하는 스님이 없어서 그렇다"고 했다. 삼중 스님은 '그럼 내가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1000여명 재소자가 들어찬 교도소 강당에서 마이크를 처음 잡았다. 스님은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러분과 나는 닮은 데가 많습니다. 머리를 깎았고, 푸른 옷을 입었고,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술도 못 먹고 이성관계도 못 갖습니다. 다만 나는 이 강연이 끝나면 자유의 몸이 되지만, 여러분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죄를 지었고 그에 대한 법의 판결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와' 하고 웃던 재소자들 얼굴이 점차 진지해졌다. 삼중 스님은 "그날 그들 얼굴을 보면서 '부처님은 잘난 사람이 아닌 못 살고 죄지은 이들을 위해 오신 분 아닌가. 승려인 내가 이젠 이들을 돕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범죄자 교화가 쉽진 않았겠죠.

    "내가 교화한 건 아닙니다. 그저 대화를 했을 뿐이죠. 교화가 됐다면 그들 스스로가 부처님을 만난 덕일 겁니다. 처음 만난 사형수는 김세진이라는 거물 간첩이었어요. 그때 나는 고작 20대였는데, 나이 오십쯤 먹은 죄수가 새하얀 모시옷을 입고 웃는 표정으로 들어오는 겁니다. 그 기에 압도돼 질려버렸죠. 한 1년쯤 이야기를 나눴나, 그가 하루는 이래요. '스님, 이제 정체를 밝히시죠. 당신은 나를 회유하러 온 중앙정보부 직원 아닙니까.' 그 말에 '당신 같은 사람과 얼굴을 마주한 게 잘못이었소' 하고 나와버렸어요. 그 후 김세진 사형이 집행된다는 얘기를 듣고 교도소에 다시 들어갔어요. 그가 날 보더니 "스님, 당신을 오해해서 미안했습니다. '김일성 만세'를 외치고 죽어야 하겠지만, 안 하겠습니다"라고 해요. 죽기 직전에 전향한 거죠. 스스로 교화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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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삼중 스님의 어머니〈사진 오른쪽〉는 살아생전 자주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스님 앞에서 얼굴 내밀기엔 부끄러운 어머니”라면서. ②일본에서 석방돼 돌아온 김희로〈사진 오른쪽〉가 삼중 스님과 2000년 부산에서 투표하는 모습. 한국에서 김씨가 처음 한 투표였다./삼중 스님 제공·조선일보 DB

    1978년엔 사형수 양정수(가명)를 만났다. 양정수는 살인·강도·강간을 저지른 흉악범이었지만 교도소에서 뉘우친 후 80세 넘은 노모를 걱정하며 지내고 있었다. 삼중 스님은 재소자들의 부탁을 받고 양정수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는 아들이 수감된 이후 '나 혼자 따뜻한 방에서 잘 수 없다'며 3년간 불 한 번 때지 않고 차디찬 집에서 지냈고, 아들 죄를 대신 씻는다며 매일 동네 곳곳을 쓸고 닦으며 살고 있었다. "아들이 죽으면 그 뼛가루를 뿌려 까막까치 밥으로 주고 나도 따라 자결하려 한다"고도 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연이었다. 삼중 스님은 기자와 방송국 PD를 찾아다니고 법무부장관에게 탄원서도 썼다. 그해 12월 양정수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받았다. 1997년 12월 이후로 사형은 한건도 집행되지 않았다.

    ―그래도 죄인인데 사형을 막아야 할까요.

    "죄를 지었으면 처벌을 받아야죠.다만 사형수라도 가족이 있는 법이에요. 사형수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그 어머니는 평생 아들의 죄를 대신 안고 통곡의 벽에 갇혀 살아야 합니다. 고백건대 내겐 사형수에 대한 연민보다 그들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이 더 컸습니다.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사형수를 위해 때론 감형 운동을 했던 것도 결국 그들 어머니가 흘린 눈물 때문이지요. 그분들은 죄가 없지 않습니까?"

    ―그들 어머니를 만나면서 스님 어머니 생각도 났을까요.

    "그럼요." 삼중 스님은 잠시 말을 끊었다. "승려는 속세와 인연을 끊고 살아야 한다지만, 어머니까지 잊고 사는 게 어디 쉽습니까."

    형무소 담장 너머 태어난 아이

    삼중 스님은 1942년 서울 서대문 형무소 뒤편 단칸방 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가 돌이 될 무렵 숨졌다. 6·25 전쟁 때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란을 떠났다. 친척집과 여관방을 전전했고, 먹고살기 위해 부산 검찰청 구내에서 담배를 팔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어머니는 재혼했고, 소년은 집을 나와 하숙 생활을 하다 17세 무렵 어머니를 떠나 대구 친척집에서 지냈다. 애초 고시를 봐 검사나 변호사가 되고 싶었지만 집안 사정이 여의치가 않았다. 대구에서 200리 길을 걸어 경남 합천 해인사에 갔고 그곳에서 조계종 제2대 종정을 지낸 이청담 스님을 만났다. "뭐하러 중이 되려 하느냐"는 청담 스님 물음에 소년은 "세상에서 가장 착한 사람이 되고 싶고, 죽음이 없는 영원한 인생을 찾고 싶다"고 했다.

    ―그 나이엔 착한 사람보단 대단한 사람이 되고 싶은 법 아닙니까.

    "내 딴엔 그게 복수였어요. 세상이 다 밉고 원망스러웠죠. 마음 같아선 당장 출세해서 복수하고 싶었지만 그게 어디 쉽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복수를 해야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답을 얻었어요. 스님이 되면 진정한 복수를 할 수 있을 거라고요. 법을 어기는 사람,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 그들과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속세를 떠나서 선하게 사는 스님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는 결론을 얻었던 거죠. 돌아보면 맹랑한 꿈이었지만요."

    ―형무소 뒤편에 태어나 사형수들과 인연을 맺은 것도 운명일까요.

    "대단히도 질긴 운명이겠죠. 서대문 형무소 뒤편, 지금은 사라진 그 옛 집터를 더듬어보려고 백 번쯤 가봤나 그래요. 지금도 그곳에서 사금파리 가지고 놀면서 담 너머 죄수를 봤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나거든요. 푸른 옷 입고 밭을 갈다가 간수가 호령하면 다시 끌려 들어가던 그 사람들 말이지요. 그때 어머니에게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지내느냐'고 물었고, 어머니가 '죄를 지어서 그렇다'고 답했던 것도 기억납니다. 어린 마음에 '불쌍하다'라고 중얼거렸을 거예요. 돌아보면 인생의 모든 일이 그때부터 시작됐고 여기까지 굴러왔겠죠."

    삼중 스님 어머니는 2005년 세상을 떠났다. 말년을 아들의 포교당에서 뒷바라지 받으며 보냈던 병상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스님 죄송합니다. 평생 신세만 지다 갑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임종은 차마 지키지 못했다. 속세를 떠난 승려에겐 어머니도 없고 혈육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삼중 스님은 "하지만 그 마음은 진심이 아니었다"고 했다.

    ―후회하시나요.

    "글쎄요…. 어머니 떠나보내고 나서 뒤늦게 깨달았어요. 평생 제대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 해 드렸다는 걸요." 2007년엔 '사형수의 눈물을 따라 어머니의 사랑을 따라'라는 책을 펴냈다. 삼중 스님은 책에 이렇게 썼다. '나는 평생토록 어머니라는 이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 어머니를 통해서, 그리고 수없이 만났던 사형수들의 어머니를 통해서 나는 늘 어머니의 존재에 매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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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8월 서울 잠원동성당이 서울대교구에 안중근 유묵 ‘경천’을 기증한 날 삼중 스님도 참석했다. 스님은 “나를 기증식에까지 불러줘서 참 고마웠다”고 했다. /삼중 스님 제공·조선일보 DB

    아름다운 사형수 안중근

    1980년대부터 삼중 스님은 일본을 오가며 활동한다. 일본 교도소에 들어가 그곳 재소자들에게 강연했고, 야쿠자 두 명을 죽인 재일동포 김희로를 위한 석방운동을 벌였다. 삼중 스님은 "김희로 어머니 박득숙씨가 30년 동안 아들 석방을 기다리며 구명운동을 벌인다는 얘기를 듣고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김희로는 결국 1999년 옥에서 풀려나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1993년에는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조선인 2만 명의 귀를 잘라 만든 이총(耳塚) 유토를 단지에 담아와 전북 부안에 안장하고 원혼 추모제를 지내기도 했다.

    ―왜 그토록 일본과 얽힌 우리나라 역사에 집착했습니까.

    "그 응결된 아픔을 풀지 못하면 우리가 더 앞으로 나갈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요. 내일 발 뻗고 자려면 어제 얻은 상처부터 치료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1992년에는 일본 미야기현 대림사 근처에 갔다가 '위국헌신군인본분(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몸을 바치는 건 군인의 본분이라는 뜻)'이라고 적힌 큼지막한 비석을 하나 보게 됐다. 글씨 옆에는 손바닥 도장(手掌印)이 찍혀 있었다. 안중근 의사 유묵을 새긴 것이라고 했다.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눈을 감기 직전 경호를 맡았던 일본 헌병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에게 써준 글씨였다. 일본 사찰 앞에 대체 왜 이런 비석이 있는 건지 궁금했다. 물어보니 "일본 사람들조차 안중근을 존경해서 그렇다"고 했다. 삼중 스님은 "당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안중근 의사 유해와 유묵을 찾아다닌 게 그때부터였나요.

    "그렇죠. 평생 사형수를 찾아다녔던 내 인생 아닙니까. 안중근 의사는 사형수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사형수였죠. 안중근의 화두는 동양 평화였어요. 이토 히로부미를 쏜 건, 그가 동양의 평화를 유린하는 침략광이었기 때문이죠. 이 사실과 마주하는 순간 전율이 일었습니다."

    1993년에는 일본 한 고미술상이 안중근 유묵 '경천(敬天·하늘의 뜻을 섬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일본 상인은 "10억원을 달라"고 했다. 그만한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돈을 빌렸다. 10억원에 한참 못 미치는 돈을 들고 일본행 비행기를 탔고, 현지에선 아는 인맥을 다 동원해 가며 일본 상인을 어르고 달랬다. 결국 그 상인은 삼중 스님이 내민 돈만 받고 '경천'을 내줬다.

    ―그걸 20년 동안 지니고 있다가 2014년에 파셨죠.

    "마음 같아선 그냥 기증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병원을 오가면서 혈액투석을 받아야만 했는데 제겐 그럴 돈이 없었으니까요. 서울옥션 경매에 '경천'을 7억원에 내놨지만 응찰자가 없어서 유찰됐어요. 너무 고가였기 때문이겠죠. 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 예술의전당 서예관 이동국 부장이 '안중근 의사가 가톨릭 신자였고, '경천' 역시 결국 신앙의 뜻을 새긴 것이니 가톨릭 품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알아보면 어떻겠냐'고 했지요."

    결국 서울 잠원동성당이 건물보수·불우이웃돕기 등을 위해 적립해둔 예비비 5억9000만원을 내고 사겠다고 연락해왔다. '경천'이 104년 만에 천주교 품에 안긴 셈이었다. 그해 8월 서울 잠원동성당이 '경천'을 서울대교구에 기증하면서 이 유묵은 이탈리아 로마 바티칸 박물관에도 걸리게 됐다.

    ―로마까지 못 가서 안타까우시겠습니다.

    "왜 아니겠어요. 몸뚱이가 이렇지만 않다면 당장 날아가서 그곳에 걸린 '경천'을 볼 텐데 말이지요. 어떤 사형수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죽음 직전 자신의 모든 생을 걸고 우리에게 인생이 뭔지 이야기하니까요. 그 '경천' 글씨를 보십시오. 감옥소에서 썼는데도 힘이 넘칩니다. 떨림이 없어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건지 그것만 봐도 알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머니, 저는 아직도 죄인입니다

    삼중 스님은 인터뷰 6시간 내내 물 한 모금 청하지 않았다. 병자임을 잊을 정도였다.

    ―평생 사형수가 죽는 걸 옆에서 보셨죠. 죽음과 늘 가까이 있었던 셈입니다.

    "그럼에도 난 아직도 죽는 게 두렵습니다(웃음). 선승(禪僧)이 못 되는 거죠. 이 몸뚱아리를 끌고 여전히 병원에 다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요. 뭐가 그리 두려울까. 아직도 사형수들과 만나 할 일이 남아 있다고 믿어요. 욕심이겠죠. 미련이고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건 내 마지막 꿈이기도 하니까요."

    ―윤회(輪廻)를 믿으시겠죠. 다시 태어난다면 어머니와 어떻게 만나고 싶으신가요.

    "나는요…." 삼중 스님이 다시 말을 멈췄다. "기차 역무원이나 우체부처럼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땀 흘려 일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어요.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는 다음 생에는 안 만났으면 합니다. 나라는 죄인을 만나 평생 고생하셨고 힘들게 사셨으니, 다음 생에는 나와 마주치지 않고 한껏 화사하게 살다 가셨으면 해요."

    말을 마친 그가 보청기를 떼냈다.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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