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버스에 피어난 '생명의 실루엣'

  • 황주리 화가

    입력 : 2017.09.08 03:04

    [황주리의 '테이트 명작전-누드' 리뷰]
    적나라한 욕망세계 보여준 피카소… 에로티시즘·문명 비판 동시 담아

    황주리 화가
    황주리 화가
    어린 시절, 안채 깊숙한 골방에 100호 정도 되는 누드화가 걸려 있었다. 누구의 그림인지 확실치 않은 마티에르가 두껍고 붉은색과 푸른색이 주조를 이루는 어두운 느낌의 누드화였다. 어쩌면 실연의 슬픔에 가득 찬 그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마음이 무거워졌던 생각이 난다. 아마도 누드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게 한 최초의 예술품이 어릴 적 화집에서 본 로댕의 유명한 조각 '키스'였을 것이다. 실제로 그 조각품을 보았을 때는 너무 유명해서 오히려 별 감동이 없었다. 그러다 며칠 전 소마 미술관에서 만난 로댕의 키스는 그 작품에 대한 내 첫 기억을 불러일으켰고, 새삼스럽게 인류가 남긴 가장 빛나는 생명의 화석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엉뚱한 생각이지만, 내게 가장 절실한 누드의 느낌은 영화 속이나 다큐멘터리 사진 속에서 본 발가벗은 유태인들의 초상이었다. 아우슈비츠 등지에서 뼈만 남은 모습으로 찍힌 초상들이 내게 남아 있는 가장 잊히지 않는 알몸의 기억이다. 비교가 적절치는 않지만, 화가 지망생이 처음 누드화를 그리는 것은 의대생들이 처음으로 시신 해부를 하는 것과도 그 의미가 비슷할지 모른다. 산 생명을 그리는 것과 죽은 생명을 해부하는 일은 얼마나 다르고 또 얼마나 같은 일일까? 온몸이 팽팽한 젊은 여성의 누드만 그리다가 미국의 대학 실기실에서 주름이 곳곳에 접힌 노인의 누드를 그려보는 건 정말 다른 경험이었다. 테이트 명작전에서 우리는 관능과 사랑과 욕망과 고독, 나약함과 물질로서의 모든 누드를 만날 수 있다.

    파블로 피카소가 87세에 그린 ‘목걸이를 한 여성 누드’(1968년).
    파블로 피카소가 87세에 그린 ‘목걸이를 한 여성 누드’(1968년). /테이트미술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그림이 피카소의 '목걸이를 한 여성 누드'이다. 로댕의 '키스'가 욕망을 내포한 절대적인 사랑의 순간을 포착했다면, 피카소는 인간 욕망의 숨겨진 야수성과 현대 문명과 궤를 같이하는 관음적 욕망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사랑에 충만함과 에로틱한 것은 다르다. 피카소의 누드화들은 에로티시즘의 결정체인 동시에 문명비판적인 특성을 지닌다.

    누드를 거대한 붓질의 추상으로 녹여내는 미국의 대가 '윌리엄 드 쿠닝'의 '방문'이라는 그림 또한 내게 특별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왜 제목이 '방문'인지 궁금한 느낌을 자아내는 이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성의 누드가 중앙에 자리 잡고 있고, 마치 생명이 천천히 스러지는 과정을 그린 것 같기도 하다. 그 누드의 매력은 희미한 흔적 속에 수줍음과 평화로움, 슬픔과 분노와 포기의 모든 표정이 살아 있음을 보는 것이다. 말년의 화가는 치매에 걸리게 되고, 1997년 세상을 떠나기 전 치매 시기 작품들만 모은 대규모 전람회를 보았던 기억이 난다. 캔버스에 작가의 특징적인 형상은 다 없어지고, 마치 벽에 똥칠을 한다는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단순하고 기계적인 바탕칠만 남아 있었다. 치매 상태에서도 화가는 캔버스에 칠을 한다는 것이 슬프고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많은 작가가 각자 누드라는 형식을 통해 생명의 기쁨과 슬픔을 노래하거나 단지 고깃덩어리의 허무함을 표현하거나 몸을 통한 문명비판적인 시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우리는 그 속에서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그때 그 순간들을 지금 이 순간의 아름다움으로 영원히 박제시킴을 본다. 언젠가는 스러질 슬프고도 아름다운 생명의 실루엣을 몰래 훔쳐보는 가슴 뛰는 시간이었다.

    영국 국립미술관 테이트 명작전-누드
    소마미술관에서 12월 25일까지

    장소: 서울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소마미술관(지하철 8호선 몽촌토성역 1번 출구)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7시 (10월 30일까지 휴관일 없음)

    입장료: 성인 1만3000원, 65세 이상 6000원, 청소년 9000원, 어린이 6000원. 인터파크와 티몬에서 입장권 할인 판매 중. 매주 월요일 '포토데이', 입장권 할인 이벤트

    문의: (02)801-7955, www.tateseoul.com



     

    [인물정보]
    황주리 "산다는 일은 서로에 흔적 남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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