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서 몰래 읽은 "m…m…I'm coming"

    입력 : 2017.09.08 03:04

    나의 사적인 서가
    번역가 김석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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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김병철
    "죽기 전에 내가 좋아하는 고전을 나만의 언어로 옮기고 싶은 욕심이 있다."

    쥘 베른의 '해저 2만리', 데즈먼드 모리스의 '털없는 원숭이',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등을 각각 불어, 영어, 일어로 원전 번역한 김석희(65)는 4개 국어에 능통한 번역가이자 198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소설가이기도 하다. 대외 공개용 말고 조금 더 내밀한 책 고백. 이번 주인공은 지금까지 300여종의 책을 우리말로 옮긴 1급 번역가다.

    1. 당신의 번역 중 가장 성취감이 컸던 책.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은 동서고금의 작가들 가운데 가장 많이 번역될 만큼 널리 알려진 작가지만, 상당히 잘못 알려진 작가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들이 대부분 어린이 잡지에 발표되었기 때문에 아동용 과학 판타지로 오해받은 것이다. 나는 불문학과에 다니던 시절부터 낭만적 판타지에 관심이 많았다. 사실주의에 치우쳐 있던 우리 문학도 2000년대 이후 판타지를 수용하는 쪽으로 흐름이 바뀌었다. 이 기회에 쥘 베른의 주요 작품들을 제대로 번역해보자는 생각으로 그의 탄생 200주년(2005년)에 맞춰 출간할 계획을 세웠고, 10년에 걸친 작업 끝에 20권(13작품)으로 일단락되었다. 나름대로 경의와 열성을 가지고 작업에 임했는데, 뒤 표지에 들어가는 카피 문구까지도 내가 직접 작성할 정도였다.

    2. 타인 번역 중 가장 높이 평가하는 책.

    불문학자 이휘영(1919~1986) 선생님의 '홍수'. 오래전, 등단도 못하고 직장도 없이 지낼 때, 남아도는 시간을 죽이는 방편으로 르 클레지오의 '조서'를 번역했는데, 진도가 영 안 나갔다. 마침 르 클레지오의 '홍수'를 번역한 책이 있어서, 원서를 구해다 놓고 대학노트에 서너 페이지 번역한 다음, 이휘영 선생님(대학 은사이기도 하다)의 번역을 모범 답안 삼아 대조하면서 내 번역을 고치고 다듬는 식으로 작업한 적이 있다. 그야말로 번역의 기초를 배운 셈이다. 새삼 들춰보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외국어 실력과 우리말 능력이 어우러진 번역의 맛. 독해와 번역의 차이, 아니 독해에서 번역으로 오르는 사다리를 보았다고나 할까.

    3. 죄책감을 느끼지만 좋아하는, 당신의 길티 플레저.

    한때 포르노 소설에 빠진 적이 있다. 남영동역 입구 모퉁이에 헌책방이 있었는데, 그곳에 가면 앞표지가 뜯겨나간 노란 등표지의 책들이 서가 한구석에 꽂혀 있었다. 미8군에서 흘러나온 책들로, 'm…m… I'm coming' 따위의 신음소리가 상상력을 자극하고,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 대충대충 건너뛰며 읽었던 소설들. 그 무렵 인천으로 이사했는데, 책을 사들고 1호선 전철에 올라 겉으로는 영어 원서를 펴들고 폼을 잡았지만 속으로는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며 읽다 보면, 다 읽었을 때쯤 주안역에 도착하곤 했다. 이것도 나름 독해력 훈련이 아니었을까.

    4. 당신 책장 안에 있다면 타인이 깜짝 놀랄 책은.

    요리책. 두 자 폭의 서가 한 칸을 채우고도 남는다. 집에만 박혀 지내다 보니 종종 요리를 할 필요와 기회가 생겼는데, 그래서 요리책도 종종 구입했던 것. 이참에 덧붙이자면, 내가 말이 좀 굼뜬 편인데 요리 이야기만 나오면 달변이 된다. 이런 면을 눈치챈 어느 편집자가 나보고 요리책을 내자고 제의한 적도 있다. 예컨대 내 고향 제주의 향토음식을 마빈 해리스의 '음식문화의 수수께끼' 식으로 정리하기. 말로는 약속했지만 다행히 계약서는 쓰지 않았다.

    5. 당신이 받은 책 선물 중 잊지 못할 책.

    1980년 초반에 출판사에 잠시 다닌 적이 있다. 그때 한 일이 '세계문학전집' 교열 작업이었다. '모비 딕'도 그중 하나였는데, 원서와 대조하면서 꽤나 열심히 했다. 하루는 팀장이 책을 한 권 건네는데, 받아보니 면지(面紙·책 앞뒤 표지 안쪽에 있는 지면) 에 '金碩禧 仁兄에게'라고 쓰여 있었다. 수고했다는 인사의 선물인 것. 그때만 해도 내가 번역을 업으로 삼게 될 줄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사반세기가 지난 뒤 그 '모비 딕'을 직접 번역하게 되었으니, 인연의 고리를 실감한 바 있다.

    6. 당신의 가을을 지금 함께하고 있는 책은?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친구인 장경렬 교수가 번역해서 준 책인데, 읽다 말다를 몇 번 되풀이했다. 지난여름 날이 하도 더워서 다른 일은 아예 손대기도 싫기에 이 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반쯤 읽었으니, 지금처럼 천천히 읽으면 올해 안에는 다 읽지 않겠나 싶다. 요즘 번역 중인 책은 'A Robot in the Garden'.

    7. 귀퉁이가 가장 많이 닳은 책은?

    사전류(영한, 불한, 일한). 번역을 많이 하던 시절엔 귀퉁이가 하도 닳아서 거의 해마다 갈아치웠다. 번역 전문가가 무엇 때문에 사전을 그리 자주 보냐고 할지 모르나, 평범한 단어라도 그것이 문맥 속에서 담당한 몫을 찾다보면 사전을 들추며, 오히려 사전 안에 갇혀 있지 않은 다른 뜻을 궁리할 필요가 있다. 말의 숲속을 거닐며 한숨 돌리는 꼴이다. 롱맨출판사의 'Dictionary of English Language and Culture'도 자주 만났는데, 요즘은 '구글'과 '위키피디아' 때문에 사이가 많이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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