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으로 문지르고, 한지를 긁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미학

    입력 : 2017.09.05 03:04 | 수정 : 2017.09.05 06:28

    - 오치균 '로드 무비'
    30년 넘게 指頭畵 기법 고집한 작가… 뉴욕·산타페·사북 넘나든 여정 그려

    - 유근택 '어떤 산책'
    한국화에 도시 일상 그린 파격의 작가… 철솔로 긁어 한지 物性 살린 신작 선봬

    미술에서 질감을 뜻하는 '마티에르(matiere)'는 화가에겐 생명 같은 요소다. 물감으로 색과 형태를 표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기만의 독특한 조형미를 구현할 수 있어서다. 거친 바위에 그린 듯한 박수근(1914~1965) 그림이 대표적이다. 격자 모양 요철이 있는 판재에 밝은 물감, 어두운 물감을 번갈아 칠해가며 깊고 담백한 바탕을 만들어낸 박수근 기법은 지금도 미술품 전문가들의 연구 대상이다.

    그 뭉근한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두 전시가 가을 문턱에 열린다. 17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는 유근택의 '어떤 산책'과 30일까지 인사동 노화랑에서 열리는 오치균의 '로드 무비'다. 한국화·서양화를 대표하는 두 중견 작가가 '길'을 테마로 삼은 점, 수십 년 화업으로 일군 독창적 미학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열 손가락으로 빚어낸 강렬한 질감

    오치균(62)의 '로드 무비'는 열 손가락과 캔버스가 만나 빚어낸 마티에르 변천사다. 붓 대신 손가락으로 물감을 쌓고 문지르는 일명 '지두화(指頭畵)' 기법을 30년 넘게 고집해온 작가의 내공을 음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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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치균(왼쪽). 할리 데이비드슨을 타고 다닐 것 같은 외모처럼 오치균의 그림엔 에너지가 넘친다. 2005년에 그린‘사북의 겨울(Winter Sabuk)’은 얼어붙은 탄광촌에 노란색 가로등을 밝힌 오치균 대표작 중 하나다. /김연정 객원기자·노화랑
    산타페, 서울, 뉴욕, 사북 등 작가가 살았거나 떠돌았던 길 위의 풍경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뉴욕 센트럴파크를 그린 신작과 구작 한두 점을 제외하곤 한 번도 세상에 발표하지 않은 작품들. 오치균은 "장소에 따라 내가 구현해낸 캔버스의 질감이 제각각 달랐다는 걸 새삼 느꼈다"고 했다. "고향집과 오래 유학했던 뉴욕 소호처럼 내 몸에 체화된 장소를 그릴 땐 물감을 두껍게 얹어 진하게 표현했더군요. 뉴욕서 돌아와 마주한 낯선 서울을 그릴 땐 엷고 희미해졌고요." 달라지지 않은 것도 있다. 최재원 큐레이터는 "오치균 그림의 단서는 흙과 태양의 색깔인 노랑"이라며 "한겨울 새파랗게 얼어붙은 사북 탄광촌에도 노란 가로등을 밝혀주는 게 오치균의 미학"이라고 했다. 먹구름 몰려오는 산타페의 하늘, 탄광촌 담장 아래 노랗게 핀 민들레의 서정을 오치균의 열 손가락은 어떻게 변주했는지 비교하는 맛이 일품. 2000년대 중반 '감나무 화가'로 불리며 '비싼 작가' 대열에 올랐던 오치균은 "단색화 열풍에 뒷전으로 밀린 지금이 그간의 작업을 돌아보게 한 소중한 시간이었다"며 웃었다. (02)732-3558

    ◇한지의 物性을 실험하다

    유근택(52·성신여대 교수)의 '어떤 산책'은 한국화의 파격과 실험이 물씬한 전시다. 무릉도원 대신 아파트, 공원 같은 도시 풍경을 그려 넣어 한국화의 어법을 파괴해온 작가가 한지의 물성을 붙들고 다시 3년간 실험한 결과다. "한지를 여섯 겹 붙인 뒤 물에 적신 상태에서 철솔로 마구 문질러 종이의 섬유질을 일으켜 세웠지요. 종이 사이로 만들어진 공간, 그 숨을 조금씩 죽여가면서 작업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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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근택(왼쪽). 한국화에 평범한 일상의 숨결을 불어넣어온 유근택의‘방’연작. 한지를 철 솔로 긁어 섬유질을 일으켜 세운 뒤 그려넣은 모기장 속 남녀의 풍경은 들여다볼수록 에로틱하다. /갤러리 현대
    화폭엔 책장, 모기장, 산책, 샤워 같은 일상이 그려져 있다. 요철이 생겨 두꺼워진 종이 탓에 그림 형태가 또렷하지 않고 흐릿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멀리서 봐야 화면에 숨겨진 이미지가 보인다. 모기장 친 '방'시리즈는 오묘하다. 박수근 질감에 장욱진의 '모기장'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침대에 누운 남녀의 몸이 에로틱한 느낌을 자아낸다. "방 안에 만들어진 또 다른 공간, 그곳이 주는 특유의 위안감이 좋아서요. 헤테로토피아(현실 속 이상향)랄까."

    '어떤 도서관' 연작은 한결 묵직하다. 시간과 지식 빼곡히 쌓인 서가에 빨래, 해골, 총 같은 이미지가 둥둥 떠다닌다. "어느 집 책장이든 여행 사진, 기념품, 엽서 같은 잡동사니가 책과 뒤섞여 있잖아요? 삶과 역사가 뒤엉키는 서사를 표현해보고 싶었습니다." 8일 성곡미술관에선 작가의 또 다른 전시가 시작된다. 기존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새로운 시도다. (02)228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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