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싸지만 살려고 쓴 약, 왜 못사게…" 말기 암환자들 바뀐 健保에 반발

    입력 : 2017.09.04 03:09 | 수정 : 2017.09.04 22:16

    [3600명 항의서명… 9일 靑앞 시위]

    의원서 자비로 사던 신약·항암제, 대학병원 70곳서만 처방 가능
    승인받는데도 3개월 걸려… 일반 항암제 효과없는 환자들 고통

    정부가 건강보험이 적용되는 의료 서비스의 범위를 확대하고 있다. 서민들도 더 높은 수준의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대신 환자가 본인 부담으로 해오던 일부 고가(高價) 진료는 조건을 까다롭게 하는 방식으로 제한했다. 의학적으로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치료에 대해서까지 건강보험 혜택을 주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자 말기 암 환자들이 "치료 선택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며 반발한다.

    육종암을 앓는 딸(20)을 둔 네이버 '면역항암카페' 운영자 김태준(52)씨는 지난달 31일부터 말기 암 환자와 가족 등을 대상으로 인터넷 서명운동을 받고 있다. 김씨는 딸을 살리려고 지난 3년간 병원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딸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김씨가 지난해부터 희망을 거는 것은 '키트루다'라는 이름의 면역 항암제다. 면역 항암제는 암세포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면역력을 높여 암을 물리치는 신약이다. 원래 키트루다는 폐암 치료용이다. 말기암 환자들은 다른 질병용 치료제를 종종 사용한다. 뜻밖에 특정 환자에겐 다른 항암제가 증세를 호전시키는 효과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허가한 용도 외에 약을 처방하는 것을 오프라벨(off label·허가 외 사용) 처방이라고 한다.

    오프라벨 처방은 표준 항암제를 다 써봤지만 효과를 못 봤다는 말기 암 환자들에게 희망으로 여겨졌다. 최근까지는 동네 병원이나 요양병원에서 이처럼 다른 암 치료제를 처방받아 사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난달 21일부터는 이런 일이 불가능해졌다.

    키트루다 같은 비싼 신약은 최근까지 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정부는 지난달 21일 다수의 신약에 대해 건강보험을 적용하기로 했다. 대신 정부 고시(告示)를 변경해 신약을 다른 질병을 앓는 환자가 원할 경우에는 정부 지정 70여개 대형병원이 약 3개월 동안 심사하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승인을 거쳐 허용 여부를 결정하도록 했다. 말기 암환자들이 "당장 하루가 급한데, 어떻게 기다리느냐"며 반발하는 이유다. 김씨는 "치료를 받으면 살 수 있는데, 왜 내 돈으로 치료를 못 받게 하느냐"고 했다.

    김씨가 서명운동에 나선 지 나흘 만에 3612명(3일 오후 10시 기준)이 서명했다. 이들은 오는 9일 청와대 앞 시위에 나설 계획이다. 앞서 지난달 16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 앞, 지난달 29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서울사무소 앞에서 두 차례 집회를 열었다.

    말기 유방암을 앓는 여동생(35)을 둔 이모(38)씨는 "지난 4월부터 폐암 치료 신약을 사용해 병세가 호전됐는데, 최근 병원으로부터 더 이상 처방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다시 처방받기 위해선 3개월이 걸린다는데, 어떻게 기다리느냐"고 말했다.

    일부에선 의학적으로 명확하게 증명되지 않은 고가의 '오프라벨 치료'를 규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온다. 동시에 오프라벨 치료제를 쓰지 못하면 환자들의 치료 선택권이 침해된다는 우려도 있다. 대한의사협회 이용민 정책연구소장은 "환자의 치료 선택권과 관련한 논란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며 "일부 환자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치료받을 수 있는 일본 등 외국으로 갈 것"이라고 했다. 실제 최근 말기 암 환자들이 한 번에 수천만원의 비용을 부담하며 면역 항암제 치료 등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간다.

    정부가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기 위해 내년부터 특진을 없애겠다"고 한 것도 말기암 환자에겐 걱정이다. 특진은 더 큰 비용을 지불하고 실력 있다고 생각하는 의사를 특정해서 진료를 받는 것이다. 현재 전국 병원에 약 4600명의 특진의사가 있다. 식도암 환자 김모(40)씨는 "생명이 위태로운 환자 입장에선 특진료(선택 진료)를 부담하더라도 더 실력 있는 의료진을 선택하고 싶다"며 "서민 의료비를 줄이는 정책에는 찬성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환자에게 똑같은 진료를 받으라고 강요하는 것은 불합리하다"고 했다.

    바른의료연구소 김성원(50) 소장은 "모든 의료 행위에 대해 건강보험 혜택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본인이 비용을 부담한다는 것을 전제로 말기암 환자 등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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