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멸치·유부·애호박… 조금씩 섞이며 입맛 흔드네

  • 정동현 대중식당 애호가

    입력 : 2017.09.02 03:02

    [정동현의 허름해서 오히려] 서울 문래동4가 '영일분식'

    이미지 크게보기
    /정동현 제공
    막 시작한 사회생활은 아침 일찍 시작해 자정 넘어 끝이 났다. 20대 후반의 나는 매일 밤 서울 문래고가를 넘어가는 버스 안에서 창에 고개를 기대고 멍하니 밖을 바라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는 사라진 그 고가도로가 이루는 포물선 맨 꼭대기에서 보이는 것은 노랗게 불이 켜진 권투 체육관이었다. 건물 1층에는 목공소와 파출소가 있고 그 위에 있는 체육관에 올라가 보면 오래 묵은 땀 냄새와 그 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링의 찢어진 곳을 일일이 손으로 꿰매고 한국에 오직 하나뿐이던 여자 세계챔피언의 운동복을 세탁하던 관장도 있었다. '얼짱'이라는 수식어를 달고서야 겨우 스폰서를 구할 수 있었던 그녀는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는 소녀 가장이었고 고된 훈련에 발목 인대는 늘 너덜너덜했다. 어느 날 밤 피 같은 땀을 흘리던 그녀가 탈진해 체육관 구석에 쓰러졌고 결국 구급차에 실려갔다.

    그로부터 1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앙상한 노인의 갈비뼈처럼 황량한 동네이지만 점심 무렵이 되면 회춘이라도 된 듯 활기가 돈다. 이때 사람들이 몰리는 곳 중 하나는 '분식'이란 단어를 옥호에 쓰는 '영일분식'이다.

    이 동네 음식점들이 대개 그렇듯 낮은 벽을 쌓고 기와 지붕을 올린 영일분식에 사람이 몰리지 않는 때는 늦은 밤뿐이다. 작업복을 입고 머리를 뒤로 묶은 젊은 여자, 얼굴이 앳된 남자, 그들을 이끌고 온 주름 깊은 남자, 목소리 큰 중년 여자들, 러닝 셔츠만 입고 먼지를 뒤집어쓴 남자들이 모두 이곳에 모인다.

    이들 8할 이상이 시키는 것은 면이 넓적한 칼국수<사진>다. 김 가루를 한편에 한 숟가락 얹은 칼국수는 동네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자태다. 하지만 뜨거운 국물을 훌훌 불어가며 넘기면 흔치 않은 단맛이 혀를 타고 올라온다. 그 감각의 정체를 따지면 간간이 박힌 바지락과 몸을 녹이고 정체를 감춘 멸치, 유부와 애호박이다. 전분이 빠진 걸쭉한 면수에 이 작은 것들의 단맛이 조금씩 모여 섞이고 어우러진다. 그 단맛은 값싸게 입맛을 현혹하지 않는다. 대신 혀를 애살맞게 쓰다듬고 넉살 좋게 휘파람 불듯 목구멍으로 빠져 들어간다. 상마다 놓인 시큰한 배추김치를 도톰한 면발에 올려 후루룩 입속에 몰아넣으면 이와 혀와 입천장과 목구멍이 모두 출렁이는 면발의 노랫소리에 취해 젓가락을 놓을 수 없다. 여름이면 칼국수만큼이나 인기를 모으는 것이 '칼비빔'이라 불리는 비빔칼국수다. 깻가루를 살살 뿌리고 큼지막한 얼음 덩어리를 빨간 면발 위에 올려 낸 이 비빔칼국수를 먹는 사람들이 늘다가 줄어들면 한 계절이 오고 간다.

    한 그릇에 5000원 하는 이 칼국수를 먹고 사람들은 제각기 일터로 흩어진다. 누구는 철을 녹이는 불꽃 앞에 서고, 누구는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아무리 해도 끝나지 않는 일과를 마주해야 할 것이다. 새벽이면 철공소 뒷골목에서 로드워크를, 오전에는 공부를, 오후가 되면 샌드백을 치던 그녀, 김주희 선수의 마지막 소식은 세계챔피언 벨트를 내려놓고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는 것이었다. 키 160cm, 한계체중 48.98㎏으로 싸우던 그녀의 뒷모습과 이 낮은 동네, 그리고 이곳에서 한나절을 보내는 사람들 사이에는 피아(彼我)가 없다. 아무리 짜내도 마르지 않는 땀과 절대 모자라게 담아주지 않는 칼국수 한 그릇이 있을 뿐이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