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 걷다 보니 내가 주인공이었다

    입력 : 2017.08.29 03:02

    [천사­유보된 제목]

    단 한 명을 위한 60분간의 공연… 쪽지·VR 등 이용해 메시지 전달
    관객은 방 옮겨다니며 공연 참여

    서울 남산예술센터 마당에 설치된 작은 공간으로 혼자 들어섰다. MP3 이어폰에서 작은 소리가 들린다. "출발점에서 나는 혼자입니다. 단어 하나만으로도 너의 마음은 공포에 떨거나 숙연해집니다. 어둠, 이방인, 급경사, 병원…."

    암전. 어디선가 들리는 서걱서걱 소리에 등골이 서늘해진다. 저 멀리 흰색의 물체가 어렴풋이 보인다. 흰 드레스에 긴 머리를 치렁이는 작은 소녀. 그의 손에 들린 불빛을 따라 관객은 이동한다. 좁은 길을 걷다 온통 하얀 방으로 향한다. 문이 철컥 닫힌다. '병동'에 갇힌 느낌. 의자에 앉은 소녀는 뜻 모를 손짓을 반복한다.

    ‘천사-유보된 제목’공연 맨 마지막에서 관객은 남산예술센터 5층 강당에 홀로 앉아 VR 속 영상을 만난다.
    ‘천사-유보된 제목’공연 맨 마지막에서 관객은 남산예술센터 5층 강당에 홀로 앉아 VR 속 영상을 만난다. 영상 속에선 몽환적 이미지의 마술쇼 등과 함께 그간 지나왔던 객석과 방을 보여주며 자신의 과거와 기억을 곱씹게 한다. /서울문화재단
    서울문화재단과 아트선재센터 공동제작으로 29일부터 9월 3일까지 서울 남산예술센터에서 선보일 '천사―유보된 제목'(연출 서현석)은 관객 한 명만을 위한 공연이라는 점에서 화제를 모았다. 27일 미리 체험해본 공연은 '낯설다' 생각한 것이 '진부함' 그 자체고, 진부함을 낯설게 변화시켜 관객의 허를 찌른다. MP3에서 희곡처럼 흐르는 대사는 유명 사건 속 전보 메시지 등을 엮은 것이고, '어린 시절 추억의 장소는?' '친구에게 공개하지 않은 어린 시절 별명은?' 같은 물음은 포털 사이트 아이디를 등록할 때 나오는 피상적인 내용이었다. 복잡한 건물 내부와 외부를 걷다 자리잡은 복도에서 소녀가 건네준 작은 쪽지. "이것은 작고 먼 세계로부터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당신의 시간까지 살아남기 위해 우리의 시간을 버티고자 합니다." 천사 이미지를 입은 소녀는 무언가 메시지를 계속 전달하려 한다.

    그동안 세운상가 일대를 걸으며 영상 등을 통해 40년 역사를 돌아보는 '헤테로토피아'(2010), 옛 서울역사(驛舍)를 공연자의 지시에 따라 눈을 감고 이동하는 '헤테로크로니'(2012) 등 장소 특정 퍼포먼스로 이름을 알린 서현석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대학원 교수는 극장을 심리적 공간으로 재해석해 그 내밀함 속으로 관객을 던져놓는다.

    건물 전체를 공연장으로 사용하고, 관객이 방을 옮겨다닌다는 점에서 뉴욕의 무언극 '슬립노모어(Sleep No More)'를 떠올릴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줄거리 삼은 '슬립노모어'에서 관객들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 방을 다니며 '관찰자' 역할을 한다. '천사…'는 정반대다. 지시에 따라 공간을 옮기지만 행동은 능동적이다. 소녀의 동작을 따라 하기도 하고, 말도 건다. 침대에 눕고, VR 고글을 착용해 어떤 방향에서 영상이 나오는지 직접 찾는다.

    '슬립노모어'에서 공간은 장면을 이어주는 도구이지만, '천사…'에서 공간은 또 다른 주인공이다. 관객은 하얀 방, 폐허의 방, 안개의 방을 돌며 각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거센 바람, 먼지 냄새, 음악 등 공감각적인 경험을 하면서 스스로 이 공연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공포로 시작했지만 끝나고 나면 상당한 힐링과 충만함을 느낀다.

    연출가 서현석은 "극장은 관객이 정서를 공유하고 과정을 즐기는 대표 공간이지만 일률적 공감이 이 시대에 정말 유효한 사회모델인지에 대해선 회의가 들었다"며 "최근의 사회 시스템 붕괴를 보면서 소통의 부재가 주는 절대 고독을 대면하는 것이 먼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제목은 사회가 바뀌었지만 '천사'는 아직 '유보됐다'는 생각에서 정했다고 덧붙였다. 60분 공연. 하루 40명씩 총 240명이 관람할 수 있다. 70% 정도 표가 팔렸다. (02)758-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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