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24일 한·중 수교 25주년을 맞아 축하 메시지를 교환했다. 문 대통령은 "수교 이래 25년간 각 분야에서 양국 관계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을 평가한다"며 "양국 관계를 공동 번영, 더 나아가 동북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발전에 기여하는 '실질적인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발전시켜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시 주석도 "양국 관계는 부단히 발전해 양국 국민에게 실질 혜택을 주고 역내 평화·발전에 적극 기여했다"면서 "한·중 관계를 매우 중시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양국이) 정치적 상호 신뢰를 공고히 하고, 이견(異見)을 타당하게 처리해 양국 관계를 안정적이고 건전하게 발전시켜 나가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이견을 타당하게 처리'한다는 말은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를 철회하라는 요구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날 한국과 중국은 온도 차가 확연했다. 우리 외교부는 이른 아침부터 두 정상의 축하 메시지를 공개하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반면 중국 외교부는 정례 브리핑 때 "두 정상이 축하 메시지를 교환했다"고 간단하게 언급한 뒤 "사드 반대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명확하고 일관돼 있으며 어떤 변화도 없다"고 했다.
양국 전문가들은 한·중 양국 관계가 수교 25주년을 기점으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좋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는 '뉴 노멀(New Normal·새로운 기준)'의 시대에 들어섰다는 진단을 한다. 지난 25년간은 양국이 경제적 분업 관계를 바탕으로 윈·윈을 해왔지만 이제는 정치적으로 안보 전략 갈등이 본격화되고, 경제적으로도 주력 산업 분야에서 경쟁하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었다는 것이다.
중국이 경제 발전을 위해 '도광양회(韜光養晦·재능을 감추고 은밀하게 힘을 기른다)'의 길을 걷던 후진 대국에서 미국과 전략적 패권을 겨루는 세계 양강(G2)이 된 것도 과거와 달라진 환경이다. 사드 문제도 한국의 안보 문제가 아니라 미·중 간 전략 경쟁의 틀에서 바라보고 우리를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펑(朱鋒) 난징대 교수는 "지난 25년간 중국은 완전히 다른 국가가 됐는데 한국은 그런 중국에 대해 심리적, 사회적으로 전혀 준비가 안 돼 있다"고 했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1992년 수교 당시에는 중국이 천안문 사태로 고립된 상태에서 정치·경제적으로 한국이 중요했지만, 지금은 중국의 경쟁력이 올라가면서 정치적으로 한국의 중요성이 낮아졌고 경제적으로도 경쟁하는 관계가 됐다"고 했다.
[5년 전 수교행사엔 시진핑·양제츠… 이번엔 中 과기부장관 참석]
24일 중국 베이징 차이나월드호텔에서 열린 한·중 수교 25주년 기념 외교·안보 전문가들 간 토론에서는 날카로운 신경전이 펼쳐졌다. 위훙쥔 전 중국 대외연락부 부부장은 사드 배치에 대해 "한국이 중국과 러시아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미국의 의지에 따라 사드를 도입했다"며 "이해할 수 없는 틀린 선택을 했다"고 말했다. 그는 "기대를 모았던 문재인 대통령이 기대와 어긋나는 모습을 보였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 박은하 외교부 공공외교대사는 "사드 배치는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맞서 국민 안전을 위해 내린 결정"이라며 "사드 배치가 옳은지를 따지기보다 사드의 근본 원인인 북핵 위협을 해결하기 위해 공동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반박했다.
관영 환구시보와 영자지 차이나데일리 등은 이날 사설에서 "사드에 대한 입장이 서로 분명한 만큼 한국은 중국의 사드 보복에 대해 원망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사드 문제가 어떤 식으로 결론 나더라도 양국 교류는 이전의 열기를 회복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주펑 난징대 교수는 "과거에는 한·중이 경제 따로, 안보 따로 갈 수 있었지만 이제 중국의 안보 문제는 결국 경제 문제와 한데 묶여 있다는 점이 사드 문제에서 드러났다"며 "미래 한·중 관계는 한국이 중국을 상대로 경제와 안보를 묶어낼 수 있는 어떤 해법을 찾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인민대 스인훙 교수도 "자국 안보 문제에 관한 한 중국은 단 한 치도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며 "이 점이 문재인 정부를 비롯한 앞으로 한국의 선택과 입지를 제약할 것"이라고 말했다.
양국은 사드 문제뿐만 아니라 그동안 서로가 윈윈했던 경제 분야에서도 본질적인 변화를 겪고 있다. 한국 부품에 의존하면서 핵심 제조업에서 우리를 따라오지 못하던 중국은 최근 10여 년간 철강·석유화학 등 주력 산업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국가 주도의 대규모 투자로 단기간에 기술력을 끌어올린 것이다.
양국 교역량도 2014년 2354억달러를 정점으로 하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중국이 한국으로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 등 부품을 수입한 후 완제품으로 조립해 수출하던 전략에서 아예 자체 생산하는 방향으로 산업구조를 바꾸고 있는 것이 주요인이다. 지난해 우리의 대중 수출은 '사드 보복'으로 직격탄을 맞아 6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김동길 베이징대 역사학과 교수는 "중국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이제 한국이 중국에 대해 갖고 있던 경제 프리미엄은 사라졌다"며 "사드가 어떻게 해결되든 양국 관계는 앞으로 철두철미한 국익(國益) 계산에 따라 협력과 갈등을 주고받는 단계로 진입했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지난 25년 동안과 완전히 달라진 동북아 정세 속에서 향후 25년의 한·중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하는 만큼 정확한 정세 분석을 토대로 한 대중 전략 수립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은 "우리는 사드 사태를 통해 중국이 자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한국의 주권과 이익은 무시할 수 있는 나라라는 걸 알게 됐다"며 "앞으로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중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를 줄이고 어떤 나라와 손을 잡아서 동아시아의 전략적 균형을 회복할 것인지가 우리 외교·안보 전략의 가장 큰 숙제"라고 했다.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중국에 대한 경제적 우위를 유지하면서 한·미 동맹은 물론 인도, 러시아, 일본 등 중국 주변의 다른 강국들과도 네트워크를 구축해 중국과 균형을 맞춰 나가야 한다"고 했다.
박병광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동북아연구실장은 "우리는 중국이 북핵 해결사가 돼 줄 것이라든가 장기적으로 미국의 대체재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하고, 중국에도 한국이 한·미 동맹을 벗어나 중국 쪽으로 갈 것이란 환상을 버리라고 해야 한다"며 "사드 문제로 드러난 중국의 민낯을 기억하며 냉정하게 전략적인 입장에서 미래의 한·중 관계를 계획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