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운동선수보다 우체부가 오래 살아요, 왠지 아시나요"

    입력 : 2017.08.12 03:02

    '내 몸 공부' 펴낸 심혈관 세계적 권위자 엄융의 서울대 명예교수

    대중 교양서를 내게 된 이유
    인문·사회·예술 계통 사람 인체공부 땐 전공 더 잘 이해

    간질병 환자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질병 자세히 기술
    색·형체 모호한 모네 작품… 백내장을 앓은 탓이죠

    안철수 前대표 스승이신데…
    데이터 정리·분석 잘했죠 성격이 딱 학자 같아서
    생리학자로 성공했을 텐데 정치인 될 줄 꿈에도 몰랐다

    내 인생의 부전공은 '와인'
    프랑스인들 심장질환 적어 마늘·올리브유 등 즐겨 먹고
    즐겁게 살려는 삶 등 복합작용… 와인도 한몫하고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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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융의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내 부전공은 와인”이라고 했다. “와인이든, 운동이든 인생의 부전공 하나쯤은 있어야 해요. 그것이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다양한 분야의 많은 사람을 만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하죠.” / 이태경 기자
    엄융의(73)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는 생체 기능을 연구하는 생리학(生理學) 학자로, 심혈관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다. 2013년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국제 생리학술지인 '유럽생리학회지' 주필이 됐다. 이 학회지는 1868년부터 발간한 최고(最古) 생리학술지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인 그는 중국 시안자오퉁―리버풀대 초빙교수, 영국 옥스퍼드대와 원광대 객원연구원이기도 하다. 권위 있는 국제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만 100편이 넘는다.

    엄 교수는 최근 '내 몸 공부'(창비)라는 책을 냈다. 그는 요즘 잘 팔리는 건강 교양서처럼 어떤 걸 먹거나 무슨 운동을 하면 건강해진다고 쓰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몸을 제대로 아는 게 건강하고 오래 사는 삶의 첫 단추"라면서 면역계, 뼈, 심장, 폐, 감각계, 소화기관, 신장, 생식계, 내분비계, 신경계 등이 작동하는 원리를 설명했다. 최근 서울대 의대 동창회관에서 엄 교수를 만나 책 펴낸 이야기를 나눴다.

    "나 자신을 아는 게 건강 첫 걸음"

    ―40년간 의사를 키워냈고 의학 논문을 주로 썼는데, 대중 교양서적을 낸 이유가 있습니까.

    "2005년부터 10년간 서울대에서 '우리 몸의 이해'라는 교양과목을 가르쳤어요. 어떤 공부를 하든 자기 몸이 중심이 되는 건데, 인체를 잘 모른다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서 과목을 신설해 달라고 요청했죠. 인문, 사회, 예술 계통 사람들이 인체에 대해 공부하면 자기 분야에 대한 이해가 더 커지죠. 예를 들어 도스토옙스키 작품에는 간질병 환자가 반드시 등장하고, 이에 대해 자세히 기술돼 있습니다. 그가 간질병 환자였기 때문이죠. 프랑스 화가 모네 작품 중 일부는 색과 형체가 뚜렷하지 않죠. 이를 두고 사물의 색과 형체가 빛에 따라 변하는 걸 보여준다고 하는데, 사실 그는 백내장을 앓았어요. 원래 물체가 다 흐리게 보인 게 영향을 준 거죠."

    ―책머리에 제목이 '나 자신을 알아보자'더군요.

    "제 교양강의 첫 시간 제목이기도 해요. 시각장애인이 코끼리 다리 만지는 사진을 함께 보여주죠. 자기 몸에 대해 잘 모르고 건강해지려는 게 이렇다는 겁니다. 현대의학의 모습도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어떤 점에서요?

    "고혈압, 당뇨병, 암 등은 한 가지 원인이 아니라 여러 가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일어난다고 봅니다. 사람이나 상황에 따라 병의 상태나 원인, 치료법이 다르죠. 따라서 병의 원인이라고 생각되는 것 하나에 집중하는 것보다 몸의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생각해야 합니다. 때문에 의사는 환자의 신체뿐 아니라 심리 상태, 가정·직장 문제까지 상담해야 하는데, 지금 의사들은 보통 1~2분만 진찰하고 끝이죠. 당뇨병 환자는 혈당 수치만 확인하는 식이죠."

    ―책에서 '심장이 빨리 뛰면 일찍 죽는다'는 내용이 흥미롭더군요.

    "심장이 뛰는 속도는 수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일반적으로 심장박동이 빠른 동물은 수명이 짧고 느린 동물은 수명이 길죠. 격렬한 운동을 많이 하는 운동선수,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의사의 평균 수명이 짧다고 해요. 수명이 가장 긴 직업은 우체부로 조사된 적이 있죠. 우체부는 격하지 않은 운동인 걷기를 꾸준히 해서 그런 결과가 나왔던 것 같은데, 오토바이 타고 다니는 요즘 우체부는 어떨지 모르겠네요. 정해진 심장 박동수를 오랫동안 조화롭게 유지하는 게 건강관리의 핵심인지도 모르죠."

    ―근육이 너무 많은 것도 건강에 해롭다고요?

    "일반적으로 지방이 많으면 나쁘고 근육이 많으면 좋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근육이 너무 많으면 심장에 부담을 줘서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한국인 사망원인은 암, 뇌혈관질환, 심장 순인데요, 암과 뇌혈관 질환은 조기 발견해 사망률이 줄어드는데 심장질환은 증가하고 있어요. 미국은 심장질환 사망률이 가장 높죠."

    이 책을 쓰는 데 3년이 걸렸다. 2015년 서울대병원에서 받은 전립선암 수술 때문이었다. 암이 초기에 발견돼 수술 후 3~4일이면 퇴원할 줄 알았는데, 수술 부작용으로 장기가 모두 균에 오염됐고 복막염까지 걸렸다. 71세 나이에 배를 열고 장기를 모두 세척하는 큰 수술을 받느라 한 달간 입원했다.

    ―의사를 원망했겠군요.

    "제가 서울대 교수이고 하니 의사가 잘해주려고 하다가 탈이 난 건데요. 이런 걸 의학계에서 'VIP 신드롬'이라고 해요. 제가 지금 건강하니까 그걸로 된 거죠."

    ―암수술 후유증으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 안 하셨어요?

    "아니요, 그런 생각은 별로 안 했어요. 뭐 고생 좀 하겠지만 별문제 있겠나 했죠."

    "두 번 생사 고비, 인생관 바꿔"

    엄 교수는 1944년 전북 임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뜻에 따라 의사가 되려고 의대에 입학했는데, 졸업할 때쯤 생리학의 길을 선택했다. "아버지께서 일제강점기 일본 교토 근처 오카야마 지역으로 유학을 가셨을 때 결핵에 걸리셨대요. 돈이 거의 없었는데 병원에서 무료로 치료해 줬답니다. 마침 큰 홍수가 나서 대피를 해야 하는데도 결핵 환자는 움직이면 안 돼서 병실에 남아야 했대요. 그런데 일본 의사도 함께 남아서 치료를 해줬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제가 그런 의사가 되길 바라신 거죠."

    ―왜 생리학 교수가 되기로 했나요?

    "당시 우리나라 기초의학 분야가 많이 낙후돼 있었어요. 임상 의사가 돼 환자를 돕는 것도 좋지만, 의학 연구하고 의사 가르치는 방법으로도 환자를 도울 수 있다고 부모님을 설득했죠. 또 조금 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요. 의사들은 거의 매일 수십~수백명 환자를 돌봐야 하잖아요. 생리학 교수가 돈은 많이 못 벌지만 매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유연성 있게 연구하고 삶을 사는 게 큰 매력으로 다가왔어요."

    엄 교수는 1979년 미국 록펠러재단 후원으로 영국 옥스퍼드대에 유학을 떠났다. 그 이듬해 폐결핵에 장결핵까지 걸려 1년간 투병 생활을 했다. "그때 정말 죽을 뻔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여유를 찾게 된 것 같아요. 제가 당시 강박적으로 연구에 집착했거든요. 국내에선 연구비가 없어서 연구를 못 할 때가 많았어요. 정말 고통스러웠죠. 그런데 치료 후에 느꼈어요. '세상의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되는 건 아니구나'라고요."

    엄 교수는 오디오와 컴퓨터 전문가로도 통한다. 그는 "1990년대 이전까지 연구비가 열악해 직접 전자 실험기구를 만들기도 했는데 그때 익힌 재주"라고 했다. 대학원생 때 교수 부탁을 받고 진공관 앰프도 만들었다. 그는 1980년대 이미 실험실에 애플 컴퓨터를 들여왔다.

    엄 교수는 안철수 국민의당 전 대표의 스승으로도 유명하다. "안철수가 서울대 의대 졸업하고 우리 연구실에 들어왔죠. 원래 컴퓨터를 잘했어요. 그때 컴퓨터 데이터 정리하고 분석할 사람이 없어서 안철수를 일본 교토대에 보내서 공부하게 했죠. 성격이 딱 학자 같아서 생리학자로도 성공했을 텐데, 정치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황우석 교수하고도 위원회 활동을 같이하셨죠.

    "황우석 교수가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기술예측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할 때 제가 보건의료계통분과 위원장으로 있었죠."

    ―안 전 대표나 황 교수처럼 인기 끌고 싶지는 않았습니까.

    "학자가 연구로 이만큼 성공하면 그걸로 된 거지요." 엄 교수는 양 팔목에 스마트 밴드를 하고 있었다. "10년 넘게 스스로 임상실험 중입니다. 심장 박동 변화를 통해 질환을 예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저는 10여 년 전부터 이 부분이 IT와 의학을 연결하는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왔어요."

    "와인은 오페라와 비슷"

    엄 교수 연구실에 들어섰을 때, 그는 인터넷으로 와인을 검색하는 중이었다. 그는 "내 인생 부전공이 와인"이라며 웃었다. 학교에 와인 동아리를 만들어 학생들과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 "와인은 오페라와 비슷해요. 이해하지 못해도 즐길 수는 있어요."

    ―와인 마시면 건강해지나요?

    "프렌치 패러독스(역설)를 말하며 와인을 예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프랑스 사람들은 기름진 음식 많이 먹고 담배도 많이 피우는데 심장질환에 걸리는 비율이 북유럽이나 미국보다 상당히 낮아요. 그 이유가 와인이라는 거죠. 하지만 어느 한 가지 요인 때문에 그런 것 같진 않아요. 지중해식 라이프스타일 때문이겠죠. 너무 고민하지 않고 기분 좋게 사는 것, 마늘·올리브유·호두기름 즐겨 먹는 것, 화창한 날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거죠. 여기에 와인도 한몫하는 거고요. 또 와인은 마시는 사람과 장소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매력적인 술입니다."

    ―와인 맛은 품종과 보관 방법에 따라 다른 것 아닌가요?

    "맛과 향은 혀와 코가 인지하지만 판단은 뇌에서 합니다.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느냐에 따라 뇌의 판단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요. 값싼 와인이라고 해도 분위기 좋은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마시면 맛있을 수밖에 없지요."

    인터뷰를 마친 뒤 엄 교수는 "점심 먹으러 가정식 백반 잘하는 곳에 가자"고 했다. 10여 분간 걸어서 간 곳은 대학로에 있는 그의 집이었다. 그는 30년 넘게 이곳에 살며 걸어서 출퇴근하고 있다고 했다. 엄 교수는 지하실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 오더니 프랑스어로 건배를 제의했다. "아 보트르 상테(당신의 건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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