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이상한 평온'

    입력 : 2017.08.11 03:16

    2013년 4월 서울에 각국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북한의 3차 핵실험 직후였다. 해외에선 한반도 전쟁설이 파다하게 돌았다. 외신 기자들은 비무장지대도 가고 길거리 시민도 인터뷰하며 부지런히 취재했다. 그러나 어디서도 전쟁의 냄새조차 찾지 못했다. 뭘 써야 할지 고민하던 기자들에게 본사의 새 지시가 날아왔다. 싸이가 신곡 '젠틀맨'을 발표하는 공연장을 취재하란 것이었다. 그날 밤 CNN은 '김정은이 싸이를 질투할 것'이란 서울발 뉴스를 내보냈다.

    ▶'평온한 한국' 미스터리는 한반도 위기 때마다 외국 언론의 단골 메뉴다. 트럼프가 "화염과 분노", 북한이 "괌 타격"으로 맞선 어제 그제도 외신들은 앞다퉈 서울 풍경을 전했다. 신촌의 어떤 대학생은 "내 생애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주식시장에서도 주가 하락은커녕 투자자들이 저가(低價) 매수의 기회로 본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SNS에선 '값싸게 괌 여행 갈 기회'라는 말까지 나돈다. 이런 상황을 한 미국 신문은 '놀랄 만큼 심드렁한 서울'이라고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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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사회의 위기 불감증을 가장 싫어할 인물이 역설적으로 김정은이다. 우리가 겁먹어 주지 않아 협박 효과가 반감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평온은 정말 현명함의 결과일까. 전문가들은 안보를 미국에 의존한 상태에서 20여년간 위협에 익숙해져 '설마' 하면서 현실을 회피하는 심리라고 한다. 몇 년 전 여론조사에 따르면 유사시 달려갈 대피소를 확인해 두었다는 응답은 1%에 불과했다. 예비군 동원령 때 입영할 부대를 안다는 사람은 10%뿐이란 조사도 있었다.

    ▶우리 위정자의 DNA엔 '설마 유전자'가 들어 있다고 한다. 눈앞에 닥친 위기 앞에서 "설마" 하다 망하는 길을 걷곤 했다. 임진왜란 때 선조는 왜의 침략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를 묵살했다가 나라가 쑥대밭 됐다. 6·25가 터진 날 아침 이승만 대통령은 경회루에서 낚시하다가 전쟁 발발 보고를 받았다. 38선 부근에서 벌어졌던 숱한 충돌들이 경계심을 무디게 했을지 모른다.

    ▶미·북 충돌이 본격화된 와중에도 정부는 휴가 모드다. 이낙연 총리와 경제 부총리 등이 줄줄이 휴가를 떠났다. 어떤 장관은 "휴가 문화 솔선수범"이라고 했다. 누구든 쉴 땐 쉬어야 하지만 '지금이 그때냐'는 지적이 많다. 형식적이라도 해오던 민방위 훈련조차 열 달째 중단 상태다. 엊그제 청와대는 "한반도 위기설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만에 하나의 사태에 대비해야 하는 것이 정부다. 정부도 '설마…' 하는 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나라정보]
    "북한은 핵 버리고 대화의 장으로 나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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