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인의 땅의 歷史] 사람들이 말하길… "창덕궁 주인은 무당이라네"

입력 2017.08.10 03:04 | 수정 2017.08.10 07:59

[86] 국정을 농단한 무당 진령군(眞靈君)

임오군란 때 충주로 간 민비… 함께 환궁한 무당을 '언니'라 부르며 총애
명륜동에 사당 지어주고 국정 자문역으로 대접
굿으로 국고 축내고 건달들에 벼슬 나눠줘
'요망한 계집…' 상소 봇물… 귀 닫힌 고종과 민비는 상소한 자들을 유배 보내
왕비는 선친 묘 네 번 이장
무당이 농락한 왕실, 무당이 농단한 국가… 결국 사라져

박종인의 땅의 歷史
불우했으되 총명했던 여자가 야반도주해 비루하되 신통력 있는 여자를 만났다. 충주 장호원 아흔아홉 칸짜리 민응식이라는 사람 집에서였다. 지금 그 집터에는 매괴성당이 서 있다. 이후 역사는 기이하게 흘러간다. 135년 전, 1882년 여름날이다.

뒤죽박죽된 인연 속에 두 여자는 두 달 뒤 장호원을 떠나 서울로 함께 올라왔다. 비루한 여자는 서울 동소문 성곽 안쪽에 터를 잡고 살았다. 사당을 짓고 살았다. 사당 이름은 북묘(北廟)다. 중국 관운장을 기리는 사당이다. 지금은 연립주택촌으로 변했다.

총명한 여자는 성은 민씨요 이름은 자영이다. 아영이라는 말도 있다. 훗날 사람들은 민비라고, 명성황후라고 불렀다. 신통력 있는 여자 이름은 박창렬이다. 사람들은 진령군(眞靈君)이라 불렀다. 세간에는 이런 말이 돌았다. "어젯밤 진령군이 창덕궁에서 한 말이 다음 날 아침에 어명으로 내려오더라"고. 진령군 박창렬은, 무당이다.

서울 명륜동 북묘

서울 명륜동 연립주택촌 골목길에 큰 암벽이 하나 있다. 골목길은 승용차 교행이 어려울 정도로 좁다. 암벽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曾朱壁立(증주벽립)'. 성리학을 완성한 증자와 주자를 잇는다는 뜻이다. 조선 중기 거물 정치가 송시열이 자기 살던 집에 새긴 글씨다. 지금이야 빽빽한 건물군 사이 골목이지만, 13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봄이면 앵두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골짜기였다. 송시열은 송자(宋子)라 불릴 정도로 거물 중의 거물이다. 이곳 지명도 송동(宋洞)이었다. 그런 거물 집터를 자기 살 곳으로 고르다니, 무당 박창렬은 보통 사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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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 진령군이 북묘를 짓고 살았던 서울 명륜동 송시열 집터. 왼쪽 벽에‘曾朱壁立(증주벽립)’이라고 새겨져 있다.
사당 건립 경위는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 동쪽 마당에 있는 비석에 적혀 있다. 이름은 '북묘묘정비(北廟廟庭碑)'다. 글은 고종이 지었고 글씨는 민영환이 썼다. 북묘라는 사당을 짓게 된 경위와 이를 대대손손 지키겠다는 의지를 적은 비석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비문에 따르면 고종은 "나와 중전의 꿈에 관운장이 나타나 나라를 살렸기에 사당을 짓는다"는 것이다.

꿈? 한 나라 최고지도자가 꿈 따위에 홀려서 사당을 지었다? 1883년 음력 10월 21일 북묘 공사가 완료되자 고종은 왕세자와 함께 가서 제사를 올렸다. 창덕궁에서 산 너머 북묘까지 길도 새로 닦았다.

임오군란과 명성황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북묘비.
서울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북묘비. 무당에 농락당한 고종 부부 내력을 읽을 수 있다.
1882년 음력 6월 9일 구식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신식군대인 별기군 급료는 후한 반면, 구식군대는 쌀로 받는 월급이 열네 달이나 밀린 데다 겨우 받은 한 달 치 쌀은 양도 적었고 절반이 모래였다. 폭우 속에 월급 담당 기관인 선혜청과 신식개혁의 자문역 일본공사관이 불탔다.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흥선대원군 지원 속에 구식군대는 이튿날 중무장을 하고서 고종이 있는 창덕궁에 난입했다. 경복궁은 화재로 방치돼 있었다. 먼저 선혜청 청장이자 병조판서(국방부장관) 민겸호를 죽였다. 타깃은 민비(명성황후·이하 민비라 한다)였다. 당시 개방 정책을 채택한 고종, 특히 왕비인 민비가 척결 대상 1호였다. 민비는 궁녀로 변장해 궁을 탈출했다. 난이 수습되고 궁으로 들어온 대원군은 민비가 죽었다고 선언했다. 종적을 알 수 없었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게 실수였다. 군란 닷새 뒤인 6월 14일 오후 3시 45분 시신 없는 수의(壽衣)를 입관까지 마치고 나흘 뒤 상복도 입었는데, 그 며느리가 충청도 장호원에서 생존 신호를 보낸 것이다.

두 달이 채 되지 않은 그해 8월 초하루, 대원군의 며느리이자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정적 민비가 화려하게 환궁했다. 대원군은 난에 군사 개입한 청나라로 일찌감치 끌려간 다음이었다.



왕비, 무당을 '언니'라 부르다

시아버지에 의해 사망 선고를 받은 왕비가 장호원에서 절치부심하고 있을 때 미색(美色)과 신통력을 겸비한 무녀 박창렬이 나타났다. 왕비가 물었다. '나는 언제 환궁(還宮)하느냐.' 무녀가 말했다. '8월 보름이나이다.' 보름 차이가 났지만, 상관없었다. 왕비는 시름을 덜어주고 희망을 준 무당을 데리고 환궁했다. 그리고 군호(君號)를 내렸다. 진령군(眞靈君). 여자에게 군호는 파격이었다. 원체 무속과 점술을 좋아하는지라, 왕비는 세상에 귀를 닫고 진령군을 맹신했다. 구한말 지식인 황현은 이렇게 기록했다. '왕비는 그 무당을 언니라 부르기도 했다.'(황현, 오하기문·梧下記聞)

무당은 궁을 제집처럼 드나들고 침전 또한 마음대로 들락거렸다. 배를 만지면 복통이 나았고 머리를 만지면 두통이 나았다. 굿을 하면 시름이 걷혔다. 무당이 궁에 상주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소문을 의식한 무당이 말했다. "저는 본디 관운장의 딸이니, 관운장 사당을 지어주면 그리로 옮기겠어요." 사대문 안 동소문 안쪽, 창덕궁에서 코 닿을 거리 경치 좋은 산기슭에 북묘가 건설됐다. 왕이 몸소 거둥해 무릎을 꿇고 제사를 지냈다. 1884년 김옥균이 주도한 갑신정변 때 왕과 왕비는 이 북묘로 피신해 목숨을 건졌다. '꿈에 관운장이 나타나 나라를 두 번이나 살렸다'는 비석 내용은 이를 말한 것이다.

무당의 국정 농단(壟斷)

'매천야록(梅泉野錄·황현)', '윤치호 일기(윤치호)' 같은 개인 기록은 물론 실록에도 진령군이 행한 악행이 세세히 기록돼 있다. 형조참의를 지낸 지석영은 이렇게 상소를 올렸다. '신령의 힘을 빙자하여 임금을 현혹시키고 기도한다는 구실로 재물을 축내며 요직을 차지하고 농간을 부린 요사스러운 계집 진령군에 세상 사람들이 살점을 씹어 먹으려고 한다.' 1894년에 올린 상소이니, 무당이 농단을 자행한 기간이 10년을 넘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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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인정문에서 바라본 인정전. 규율과 예법이 서 있어야 마땅하거늘, 조선 말 창덕궁에서는 세간에서‘요망한 계집’이라 손가락질하는 무당 하나가 국정을 농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박종인 기자
북묘는 벼슬과 돈을 노리는 양아치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의 말 한마디에 화복이 걸려 있어 수령과 변장들이 그의 손에서 나오기도 하였다. 염치없는 자들이 간혹 자매를 맺기도 하고 혹은 양아들을 맺자고도 하였다. 그중 조병식, 윤영신, 정태호 등이 더욱 심하게 보챘다.'(매천야록)

압권은 경상도 김해 사람 이유인이다. 무관을 꿈꾸며 상경한 이유인은 진령군을 북한산으로 유인해 자기 호령에 따라 시정 잡배들이 변장한 귀신을 출현시켰다. 신통력이 뛰어난 무당도 야밤 산중 귀신에게 속아 넘어갔다. 진령군은 이유인을 수양아들로 삼고서 북묘에 함께 살았다. 황현은 이리 기록했다. '아들이라 했으나, 추문(醜聞)이 들렸다.' 진령군과 이유인은 왕과 왕비에게 '금강산 일만이천봉에 쌀 한 섬과 돈 열 냥씩 바치면 나라가 평안하다'고 계시를 내렸다. 왕은 그리 시행하였다.

쏟아지는 상소

당대 지식인과 관료들 상소가 쏟아졌다. 이유인을 벌하라는 전 왕실 강사 김석룡의 상소에 고종은 "취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전 사간원 정언 안효제가 '시일야방성대곡'의 작자 장지연과 함께 '청참북묘요녀소(請斬北廟妖女疏)', 그러니까 '북묘의 요망한 계집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고종과 왕비는 안효제를 유배시키라 명했다. 결국 김석룡도, 안효제도 원악도(遠惡島), 멀고 험한 섬으로 유배형을 받았다. 안효제는 훗날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하다가 죽었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민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의 무덤.
경기도 여주에 있는 민비의 친정아버지 민치록의 무덤. 다섯 번 이장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 사이 왕비는 또 기이한 일을 벌였다. 친정아버지 민치록의 무덤을 네 번이나 이장한 것이다. 왕비가 되자마자 그녀는 경기도 여주 여흥 민씨 문중 묘역에 있던 아버지 묘를 제천, 이천, 광주를 거쳐 1894년 충남 보령 바닷가로 이장했다. 국가 최고지도자 부부가 무속과 주술에 빠져 있는 사이에 나라는 파탄이 났다. 풍수연구가인 우석대 교수 김두규가 말했다. "초장지도 썩 훌륭한 명당이었고 다른 땅도 나쁘지 않다. 다만, 왕비가 올바른 풍수관, 인생관, 국가관을 갖추지 못했을 뿐."

진령군 그 후

친정아버지 묘를 보령으로 이장한 이듬해 왕비는 일본인에 의해 시해됐다. 황제가 된 고종은 성강호라는 점쟁이에게 죽은 왕비의 혼령이 어디 있는지 캐묻곤 했다. 또 정환덕이라는 시종에게 수시로 왕실과 나라 운세를 자문했다. 정환덕 또한 역술가였다. 정환덕은 '남가록(南柯錄)'이라는 저서에 이 같은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진령군은 1894년 갑오개혁 정부 최고기관인 군국기무처에 의해 거열형(수레에 사지를 묶어 찢어 죽이는 형)을 선고받았다.(백석서독·白石書牘, 이용목) 형 집행 여부는 알 수 없다. 진령군 수양아들 이유인은 양주목사, 병조참판, 한성부 판윤, 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이어 법부대신까지 올랐다. 그리고 1907년 직권 남용 혐의로 체포되자 '놀라서'(매천야록) 죽었다. 북묘는 1910년 5월(추정) 폐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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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대조전. 이 부속건물 흥복헌에서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 회의가 열렸다.
파란만장한 여자 민자영, 민비 혹은 명성황후가 생전에 살던 창덕궁 침전 대조전(大造殿)은 1917년 화재로 전소됐다. 지금 건물은 경복궁 교태전을 뜯어다 재건했다. 그 오른쪽 부속채 이름은 흥복헌(興福軒)이다.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마지막 어전회의가 흥복헌에서 열렸다. 일주일 뒤 대한제국은 식민지가 되었다.

보령에 있던 민비의 친아버지 민치록의 묘는 2003년 왕비의 후손에 의해 처음 묻혔던 여주 선산 그 자리로 돌아왔다. 오천육장(五遷六葬). 조선 풍수사에 남는 진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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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주는 가르침… 나라를 흔들었던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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