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F서 한국과 대화 일축한 北 "우린 핵·ICBM 보유국"

    입력 : 2017.08.08 03:03

    리용호 연설… "핵은 北·美 문제, 美 적대 정책 청산해야 협상"
    남북 접촉… 강경화 "대화 제안 호응을" 리용호 "진정성 없다"

    - '베를린 구상'에 갇힌 한국 외교
    국제사회 제재 강화에 발 맞추며 北과 대화까지 신경써야 할 상황
    일관된 메시지 못 내 혼선 일어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필리핀 마닐라에서 6일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만찬에서 북한 리용호 외무상에게 "남북 대화 제안에 호응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리용호는 "진정성이 없다"며 이를 일축했다. 이어 리용호는 7일 ARF 외무장관 회의 연설에서 "우리는 책임 있는 핵보유국, 대륙간탄도로케트(ICBM) 보유국이다"며 "미국의 적대시 정책과 핵 위협이 근원적으로 청산되지 않는 한 어떤 경우에도 핵과 미사일을 협상탁에 올려놓지 않겠다"고 했다. 핵·ICBM 카드를 손에 쥔 이상 한국은 제쳐 두고 미국만 상대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하면서, 국제사회에 핵보유국으로 인정하라고 한 것이다.

    ◇리용호 "핵은 북·미 문제"

    필리핀서 만난 남북 - 강경화(왼쪽) 외교부 장관이 지난 6일 저녁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지역포럼(ARF) 환영 만찬에서 리용호(오른쪽) 북한 외무상과 얘기하고 있다.
    필리핀서 만난 남북 - 강경화(왼쪽) 외교부 장관이 지난 6일 저녁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아세안지역포럼(ARF) 환영 만찬에서 리용호(오른쪽) 북한 외무상과 얘기하고 있다. /TV조선

    리용호는 이날 연설을 마친 뒤 숙소 앞에 기다리고 있던 취재진에게 연설문을 배포했다. 연설문은 8할 이상이 '핵 문제는 미·북 간의 문제'임을 강조하는 데에 초점을 맞췄다. 리용호는 연설문에서 미국의 위협 때문에 핵개발을 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를 소개한 뒤 "우리가 각종 무기 체계의 개발 과정들을 하나하나 보여주며 개발·완성한 것은 우리의 능력을 보여줘 미국의 전쟁 도발을 억제하려는 데 목적을 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ICBM 발사) 두 차례에 걸쳐 우리는 미 본토 전역을 사정권 안에 넣었다는 것을 온 세상에 보여줬다"고 했다. 리용호는 "미국이 끝내 군사적으로 덤벼든다면 핵전략 무력으로 톡톡히 버릇을 가르쳐줄 준비가 돼 있다"며 "그러나 미국의 군사행동에 가담하지 않는 한 미국을 제외한 그 어떤 나라에도 핵무기를 사용할 의도가 없다"고 했다.

    리용호의 연설에는 한국 관련 언급은 단 한 차례 나온다. "미국에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일본과 남조선당국에 대해서는 구태여 언급하지 않겠다"는 부분이다.

    북한의 이 같은 '한국 무시' 방침은 전날 강경화 장관과 리용호의 만남에서도 확인됐다. 두 장관은 ARF 만찬장 대기실에서 조우해 약 3분간 대화를 나눴다. 외교부가 공개한 당시 상황에 따르면, 강 장관은 리용호에게 악수를 청하며 "한국 신(新)정부의 베를린 구상과 후속 조치 차원의 대북 제안(군사회담, 적십자회담)에 대해 북측이 아직까지 아무런 호응이 없다. 조속한 호응을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에 리용호는 "남측이 미국과 공조해 대북 압박을 전개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제안에는 진정성이 결여돼 있다"고 했고, 강 장관은 우리 측의 진정성을 강조하며 재차 북한의 호응을 촉구했다고 한다. 북한의 ICBM 발사에 대응해 유엔 안보리가 대북 제재 결의 2371호를 채택한 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통일부도 아닌 외교부가 북한에 '대화'를 요청했다가 다시 한 번 공개적으로 거절당한 셈이다.

    '베를린 구상'이 외교 운신 폭 좁혀

    우리가 대화를 제안하고 북한이 이를 거부하는 일이 이어지면서 문재인 정부의 '베를린 구상'이 오히려 국제 무대에서 한국 외교의 운신 폭을 좁히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제사회의 제재·압박 강화 기조에 보조를 맞추면서 동시에 북한과의 대화도 신경을 써야 하는 두 가지 숙제를 떠안다 보니 외교 일선에서 일관된 메시지를 발신하지 못하고 혼선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강경화 장관이 리용호에게 대화 제안을 한 것에 대해서도 "청와대의 최대 관심사가 베를린 구상이기 때문에 외교부로서도 '북한에 확실하게 전달했다'는 점을 대외적으로 보여주려 한 것 같다"는 말이 나왔다.

    손 맞잡은 韓·美·日 -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 중인 한·미·일 외교장관이 7일 필리핀 마닐라의 한 호텔에서 열린 3국 외교장관 회의에 앞서 손을 맞잡고 있다. 세 장관은 북한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화성14형 미사일 발사 등 연이은 도발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고 대응 방안을 협의했다. 또 유엔 안보리 신규 대북 제재 결의의 철저한 이행 의지를 확인했다. 왼쪽부터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 강경화 외교부 장관,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
    손 맞잡은 韓·美·日 -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 참석 중인 한·미·일 외교장관이 7일 필리핀 마닐라의 한 호텔에서 열린 3국 외교장관 회의에 앞서 손을 맞잡고 있다. 세 장관은 북한의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 화성14형 미사일 발사 등 연이은 도발에 대한 평가를 공유하고 대응 방안을 협의했다. 또 유엔 안보리 신규 대북 제재 결의의 철저한 이행 의지를 확인했다. 왼쪽부터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 강경화 외교부 장관,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 /연합뉴스
    강 장관은 ARF를 계기로 열린 다른 양자회담에서도 '베를린 구상 전도사' 역할을 하고 있고, 외교부 당국자들은 이런 강 장관의 행보를 적극 홍보하고 있다. 지난 5일 열린 한·아세안 외교장관회에서 강 장관은 베를린 구상의 5가지 대북 원칙과 이에 따른 우리 정부의 대북 대화 제안을 예정된 시간을 넘겨가며 상세하게 설명했다. 6일 열린 한·미 외교회담에서도 강 장관은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에게 이를 다시 설명했다. 이와 함께 외교부는 아세안 회의의 결과물에도 '베를린 구상에 대한 지지'를 명시하기 위해 물밑 총력전을 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 같은 '베를린 구상의 틀'에 제한받는 외교 기조가 국제사회에서 실질적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 실제로 6일 ARF 만찬에서 외교장관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리용호 외무상을 피하며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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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대통령 "북한이 못견딜 때까지 압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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