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가 김정일 시대 때 북한을 상대했던 '10년 전 남북 정상회담의 추억'에 기반해 대북 정책 방향을 이끌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은 2007년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정상회담을 했을 때 북한을 경험했던 인사들이 주축이다. 북한 핵 개발 초기 단계였던 2007년과 북한이 '핵무기+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완성을 눈앞에 둔 2017년은 '북핵 판'이 근본적으로 바뀐 상태다. 그러나 '그때 그 사람들'은 당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가 대화로 풀자고 하면 북한이 응할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 있다는 얘기다.
문 대통령은 당시 남북 정상회담 추진위원장으로 2007년 정상회담을 준비했다. 현 대북 정책 라인의 핵심인 서훈 국정원장은 2007년 정상회담의 실무를 담당해 북측과의 협상을 총괄했다. 조명균 통일부장관은 10·4 남북정상선언 문안을 북측과 조율하고, 서 원장과 함께 정상회담에 배석했다. 임종석 비서실장은 2006년부터 남북경제문화협력재단을 이끌어온 대북 대화론자다. 이들은 이후 이명박·박근혜 정부 9년 동안 대북 정보와 정책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을 뿐 아니라, 두 정부가 북한을 압박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이해하려 하기보다는 비판만 해왔다.
한 대북 소식통은 31일 "문재인 정부 인사들은 노무현 정부 때 해봤다는 경험을 바탕으로 지금도 우리가 경제 지원 등을 지렛대로 대화를 제안하면 북한이 응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 같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 두 달도 되기 전인 지난달 6일 독일에서 '베를린 구상'을 발표하며 "김정은 위원장을 만날 용의가 있다"고 했다. 남북 군사회담, 적십자 회담,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 등을 잇따라 제안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과거와 달리 이런 공식 대화를 사전 조율할 비공식 라인은 완전히 끊겨 있는 상태고, 우리 측 제안을 북한은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다.
또 청와대는 지난 19일 문재인 정부의 100대 국정 과제를 발표하며 "2020년 완전한 핵 폐기로 이어지는 포괄적 비핵화 협상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서도 "아무 근거 없이 2020년이라는 시점을 제시한 것은 '북한은 우리가 잘 다룰 수 있다'는 추억에 기댄 희망론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가 상대하고 있는 김정은의 북한은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됐을 때 김정일의 북한과 모든 조건에서 다르다. 2007년의 북한은 1차례 핵실험만 한 상태였지만, 지금 북한은 5차례 핵실험을 통해 '핵보유국'임을 주장하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 6차례 핵실험을 끝으로 핵보유국 지위에 올랐다. 경남대 김근식 교수는 "한반도 비핵화에 형식적으로나마 동의했던 김정일과 달리 김정은은 노골적으로 '핵 포기는 없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북한의 미사일 수준은 10년간 비약적으로 발전해 사거리 1만㎞에 육박하는 ICBM으로 미국 본토를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의 실전 배치도 가시화됐다.
이런 핵·미사일 카드를 손에 쥔 김정은은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북·미 수교와 평화협정, 체제 보장 등을 요구하려 한다는 분석이다. 이 과정에서 북한은 미국만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남한은 철저하게 무시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주한 미군 철수와 북·미 평화협정 체결이기 때문에 굳이 한국 측과 협의를 할 필요성도 없다. 2007년에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한국을 활용할 필요가 있었지만, 현재는 직접 위협을 받는 미국이 어차피 나서야 할 상황이기도 하다.
정부 소식통은 "2007년 당시 북한은 핵 개발을 위한 시간을 벌고, 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해 남북 대화에 응할 요인이 있었다"며 "하지만 지금 북한은 쌀 몇만t이 아닌 훨씬 큰 목표를 두고 미국과 담판을 지으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설 자리가 거의 없다"고 했다.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도 중국 등의 지원으로 북한 경제 상황이 양호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도 김정은이 남북 관계 개선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이유다. 고려대 남성욱 교수는 "북한은 '레드라인'을 넘어 '레드존'에 들어와 있는데 문재인 정부 인사들은 여전히 2007년 남북 정상회담을 연상하면서 '대화를 통해 운전석에 앉을 수 있다'는 구상을 하고 있다"며 "이는 김정은을 잘 모르는 데서 비롯된 과거와 현재의 혼돈"이라고 했다.
정부는 이날도 대답 없는 북한을 향해 대화를 촉구했다. 백태현 통일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북한이 도발을 중단하고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자 하는 우리 측의 진정성 있는 제안에 호응해 나오기를 바란다"며 "베를린 구상의 동력이 상실되지 않도록 상황을 잘 관리해 나가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