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리스트, 헌법 위배"… 직권 남용에 징역 3년은 이례적 중형

조선일보
입력 2017.07.28 03:04 | 수정 2017.07.29 16:58

[1심 법원, 블랙리스트 선고]

"김기춘 前실장이 정점에서 지시, 은밀·집요·광범위하게 이뤄져"
김종덕 2년刑, 김상률 법정구속
조윤선은 관련 보고를 받거나 관여한 증거가 없다고 판단

"문화예술계 지원 배제 범행을 정점(頂點)에서 지시하고 실행 계획을 승인하거나 독려했다."

27일 오후 3시 10분쯤 서울중앙지법 형사30부 황병헌 부장판사가 이렇게 말하며 징역 3년 실형을 선고하자 김기춘 전 비서실장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블랙리스트 혐의'를 벗고 위증죄만 인정돼 집행유예로 석방된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남편 박성엽 변호사는 "아무도 우리 말을 들어주지 않았지만 법원이 귀를 열고 들어줬다. 감사하다"고 했다.

김 전 실장은 블랙리스트 작성 주도와 관련해 직권 남용, 강요 혐의로 기소됐다. 국회 청문회 위증 혐의도 받았다. 직권 남용, 위증은 유죄, 강요 혐의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강요죄가 성립하려면 '폭행 또는 협박'이 있어야 하는데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본 것이다. 직권 남용 행위에 대한 형량 '징역 3년'은 이례적 중형(重刑)으로 볼 수 있다. 보통 징역 1~2년이나 집행유예를 선고한다.

김기춘(왼쪽)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2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구치소로 돌아가는 호송차를 타러 이동하고 있다. 이날 조윤선(오른쪽) 전 문체부 장관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김기춘(왼쪽)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27일 서울중앙지법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구치소로 돌아가는 호송차를 타러 이동하고 있다. 이날 조윤선(오른쪽) 전 문체부 장관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고운호 기자

재판부는 김 전 실장 등이 특정 문화·예술인들에 대한 지원 배제 조치를 한 것에 대해 "어떤 명목으로도 인정될 수 없는 위법 행위"라고 했다. 특검이 작성한 공소장에 따르면 김 전 실장 지시에 따라 청와대 정무수석실과 교육문화수석실, 문체부가 만든 블랙리스트는 대상이 3000여 단체, 9000여 명에 이른다. 예술계·영화계·출판계 인사가 망라됐다. 그만큼 심각하고 광범위한 불법을 저질렀기 때문에 중형이 불가피하다는 것이 재판부 판단이다. '개입했다고 볼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무죄를 선고받은 조 전 장관이나 '개입 정도가 약하다'고 판단돼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김소영 전 문화체육비서관 외에 김종덕·김상률·신동철·정관주씨 등 4명에게 모두 실형을 선고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박근혜 정부의 '지원 배제 조치'를 정책 판단 결과로 볼 것이냐 아니면 형사처벌 대상으로 볼 것이냐였다. 김 전 실장 등은 "국가 보조금 지원은 문화 정책 기조에 따라 정부마다 다르게 집행됐다"며 "블랙리스트를 작성하라고 한 게 아니라 그동안 지원 대상에서 배제된 우파 성향 단체들을 지원해 균형을 맞추라고 한 것"이라고 했다. 사회 단체 등에 대한 국가 지원이 정권 성향에 따라 차이를 보여왔다는 주장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정책적으로 지원 배제 조치가 이뤄졌다면 적법 절차 속에서 투명하게 진행됐어야 한다"며 "그러나 반대로 위법하고, 은밀하고, 집요한 방식으로 광범위하게 진행됐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또 "김 전 실장 등이 지원 배제 범위를 설정하면서 '좌파' '야당 지지' '세월호 시국선언' 등을 기준으로 삼았는데 (기준의) 합리성을 인정할 수가 없다"고도 했다.

혐의를 전면 부인한 김 전 실장과 달리 김종덕 전 문체부 장관 등은 재판에서 가담 사실을 시인했다. 이른바 자백한 것이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상부 지시였지만 부당한 지시임이 명백한 상황에서 따른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재판부가 조윤선 전 장관에게 '블랙리스트 무죄'를 선고한 것은 블랙리스트의 은밀한 실행 과정에서 빠져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조 전 장관이 2014~2015년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재직할 당시 블랙리스트에 따른 지원 배제 조치가 진행 중이었지만, 조 전 장관은 관련 보고를 받거나 관여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 재판부는 "정관주 전 차관이 재판에서 '당시 조 수석에게 블랙리스트 보고를 했다면 업무가 (조 수석 지시로) 중단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해 후회가 된다'는 진술까지 했다"고 말했다.

김기춘 전 실장 측 변호인들은 "부당한 판결"이라며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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