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클래스] 배우 김수현과 인간 김수현, 그 사이를 보다

    입력 : 2017.08.05 15:40

    ‘한마디로 큐브’라고 김수현은 말했다. 어떻게 돌리느냐에 따라, 어떻게 뒤트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게 영화 <리얼>이라고 했다. 이 괄호 안에 ‘김수현’을 넣어 본다. 이 선량하고 반듯한 인물이 영화 속에서는 건축무한육면각체처럼 뒤틀린다. 배우 김수현과 인간 김수현은 영화처럼 1인2역의 환시인지 모른다.

    어려운 인터뷰였다. 영화는 두 시간이었지만, 두 시간 사이 많은 것이 바뀐 기분이었다. 혼란이 끝없이 이어지고, 그 길 끝에서 김수현이 걸어 나왔다. 손을 들어 환영할 수도, 미소를 지을 수도 없는 혼돈. 시사회의 분위기는 살벌했고, 배우는 기어이 눈물을 보였다. 배우에게 언론배급시사회는 시험을 치르고 성적표를 받는 기분이라고 하는데, <리얼>의 성적표는 낙제에 가까웠다. 출연한 이나, 보는 이나 난처했다. 더욱 난처한 점은, 그 와중에 김수현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었다는 것이다. 도리어 어떤 지점에서는 발화점을 넘어 폭발했다. 이 둘의 부조화를 어떻게 소화할 수 있을까. 기자에게나 배우에게나 <리얼>은 풀기 어려운 숙제였다.

    김수현은 도망치지 않았다. 영화를 본 사람이든 보지 않은 이든 <리얼>을 비웃고, 헐뜯고, 씹고, 즐기는 그 한복판에 김수현이 서 있었다. ‘괜찮으냐’는 안부의 말도, ‘개봉 후 심정이 어떠냐’는 평범한 질문도 망설여지는데, 김수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조금 더 친절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거 같아요.’

    얼굴에 묻어나는 건 후회나 회한이 아니었다. 도리어 담담함이었다. 그랬으면 좋았겠지만, 그러지 못한 지금도 괜찮다고 했다. 왜냐하면, 지금의 모습이 <리얼>의 최선이었으니까.

    “작품에 대한 아쉬움은 없어요. 이보다 더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열심히 했거든요. 저뿐만 아니라 모든 스태프가요. 시사회에서 눈물이 난 건, 억울해서나 아쉬워서가 아니라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했던 고생들이 생각나서였어요. 시사회 맨 앞자리에 우리 막내들이 앉아 있었거든요. 그 친구들이 먼저 울고 있더라고요.”

    배우 김수현의 정점 vs 인간 김수현의 절정
    시트콤의 단역, 드라마의 아역으로 등장해 <드림하이>, <해를 품은 달>, <별에서 온 그대>, <프로듀사>를 거치며 축지법을 쓰듯이 ‘지구대스타’가 된 그는 20대의 마지막 작품으로 <리얼>을 만났다. 그의 20대는 눈부셨으나 고달팠고, 배우 김수현으로의 정점이 인간 김수현으로의 절정과 맞닿지는 못했다. 그 괴리 안에서 길을 잃은 것 같을 때 찾아온 게 <리얼>이었다. “진짜 내가 누구인가”를 묻는 이 영화가 당시 김수현의 심장을 관통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배우 김수현의 자리가 커지다보니 인간 김수현이 설 자리가 점점 좁아졌어요. 나중에는 인간 김수현이 굳이 필요할까 싶기도 하고요. 어릴 때부터 선배들이 ‘그 둘의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셨는데, 막상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던데요.”

    어쩌면 <리얼>은 배우 김수현이 아닌 인간 김수현이 선택한 작품인지 모른다. 배우 김수현으로서의 커리어에 치명타가 된다고 해도, 인간 김수현으로서 꼭 한 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이야기였다. 나와 당신, 둘 중에 진짜는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 속에서는 두 명의 장태영이 등장한다.

    강한 장태영과 약한 장태영. 강한 장태영은 약한 장태영을 제거하려고 하고 약한 장태영은 여기에 저항한다. 약한 장태영은 인간 김수현이다. 그는 강한 장태영에 맞서서 기어이 살아남는다. 강한 장태영보다 더 강한 장태영이 되어서 말이다.

    “둘의 차이를 표현하는 게 이번 작품의 관건이었어요. 둘 다 제가 연기하지만 두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보여야 하니까요. 그 오묘한 차이를 표현하기 위해서 두 사람을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설정했어요. 강한 장태영은 ‘슈트 장태영’. 슈트를 입을 때 그가 가진 강인함이 가장 잘 표현되죠. 약한 장태영은 ‘따라쟁이 장태영’이에요. 그는 슈트처럼 되고 싶어하지만 뭔가 미묘하게 어긋나요. 실제로 만난다면 ‘따라쟁이 장태영’은 비호감에 가까운 인물입니다(웃음).”

    하지만 김수현은 둘 중 ‘따라쟁이’ 장태영을 더 사랑했다. 그가 가진 모자람과 불편함, 뜻대로 잘 되지 않는 불운이 김수현의 마음을 공연히 두드렸다. ‘따라쟁이’를 연기할 때 그는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가면 속에서도 자꾸 ‘피식’ 웃음이 날 정도로 그의 감정에 동화됐다.

    “<복면가왕>의 마음이 이런 거구나 싶더라고요(웃음). 가면 속에서 사람은 자유로워질 수 있어요. 전에 쓰지 않던 목소리를 내고, 전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게 되죠. ‘따라쟁이’는 그런 면에서 제게는 사랑스러운 인물이기도 했어요.”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지금껏 김수현이 연기한 인물은 조금 모자라거나, 서투르긴 했어도 비호감인 적은 없었다. 결국은 사랑받았고,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드림하이>의 송삼동(김수현)이 마음을 몰라주는 혜미(수지)를 향해 “이 농약 같은 가스나야”라며 울먹일 때나, <프로듀사>의 백승찬(김수현)이 악플에 시달리는 신디(아이유)에게 “맞지 않아도 되는 화살을 맞고, 받지 않아도 되는 상처를 받고…신디 씨는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할 때의 감동은 선연하다. (그 진심이 상대 배우에게도 전달됐는지 수지와 아이유는 <리얼>에 3초 카메오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렇게 말간 얼굴로 해양심층수 같은 진심을 길어내던 그가, 돌연 가면을 쓰더니 비호감 따라쟁이가 됐다. 일종의 용기다.

    < 리얼>은 ‘센’ 영화다. 폭력의 수위도, 스킨십의 수위도, 인물 간 주고받는 대화의 수위도 세다.

    이렇게 센 말을 하고 행동을 하면서 감정의 기복까지 가파르다. 이 삼중고에 한 인물에게서 분열된 세 명의 인물을 동시에 보여주어야 한다. 세제곱은 어려운 작업인데, 김수현은 현장에서 한 번도 ‘아니요’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촬영감독이, 혹은 무술감독이 다른 각도에서 다른 액션을 주문하면 그대로 따랐다. 그 모든 디렉션이 영화에 다 반영되는 것도 아니고, 쓰이지도 못했지만 거절하지 않았다. 스태프들은 “이렇게까지 할까 싶었는데, 이렇게까지 하더라”고 말했다.

    “모든 걸 다 불태워야 후련하잖아요. 뭔가를 남겨두고, 아껴두고 하지는 못하는 거 같아요. 다만 <리얼>에서는 제가 가진 모든 바닥이 다 나온 거 같아서 좀 아쉽기는 해요. 이런 표정, 이런 행동은 ‘나 혼자만 알고 있는 내 것이었는데’ 다 꺼내서 썼구나 싶고요. 아깝긴 한데 아쉽지는 않아요. 그렇게 싹 한번 비우고 싶기도 했거든요.”

    신인 시절 김수현의 인터뷰를 찾아보면 종종 ‘쏟아붓고 싶다’, ‘불태우고 싶다’는 말들이 등장한다. 영화 <도둑들>로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호흡을 맞춘 뒤, 바로 <은밀하게 위대하게>를 들어갔을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하다가 ‘소진될지 모른다’는 걱정을 듣는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 나는 소비돼야 할 때다.”

    갖고 있는 모든 걸 다 비우고 나야 다음을 시작할 수 있는 게 그다. 돌아보면 그의 선택은 어딘가 삐딱했다.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역시 예측 가능한 행보는 아니었다. 바보처럼 보이는 남파간첩, 초록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동네 바보 형으로 사는 동구는 그가 가진 인기나 스타성에 영합하는 작품은 아니었으니까.

    “전에 해보지 못했던 어떤 것을 할 때 신나요. 이 역할이 멋이 있느냐, 인기가 있느냐보다는 제가 전에 해보지 못했던 것을 보여줄 수 있기를 바라요. 그 역할 하나하나가 공부라고 생각하거든요. <리얼>은 지금껏 했던 작품 중에 가장 공부를 많이 한 작품이에요. 결국 가장 공부가 많이 된 작품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열심히 공부했는데 성적은 바닥이다. <리얼>은 50만 관객 정도를 기록한 뒤 예매 순위에서도 점점 내리막을 걷고 있다. 그럼에도 김수현은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는 순간, 자신이 부은 노력이 실패한 사랑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20대의 저는 잘되긴 했지만 행복하지는 않았어요.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대화하는 것도 어려웠고,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리는 건 아닌지’ 두려웠어요. 그런데 <리얼>을 찍고 나서는 행복했어요. 이 작품을 해냈다는 것만으로도 찾아오는 뿌듯함이 있었어요.”

    막 서른이 지난 그는 20대보다 지금이 더 평온하다고 말했다. 30대가 오는 것에 대한 두려움, 20대가 가는 것에 대한 조바심도 있었지만 막상 서른이 지나고 나니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편안해진 자신이 있다고 했다.


    큰 산을 넘은 뒤 찾아온 평온

    “겨울에는 내내 강원도에서 지냈어요. 아무 것도 안 하고 스키만 탔어요. 지나가는 어른들 이야기를 몰래 엿듣기도 하고요. 그 전에는 일본에 가서 기차만 탄 적도 있어요. 이제는 배우가 아닌 제가 혼자 있을 때도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조금씩 알아가는 거 같아요.”

    언론에서는 ‘실패 없던 김수현의 필모에 큰 오점을 남겼다’고 그를 염려했지만, 사실 김수현은 실패에 단련된 사람이다. 그가 연기가 하고 싶어서 ‘4수’를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연기자 지망생이자 4수생이던 김수현은 당시 재수생, 삼수생들을 잘 챙기는 형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준비 과정을 SNS에 공유하기도 했는데 “4수생의 심정은 노래방에서 1분을 남겨두고 다른 곡을 선곡하는 느낌”이라고 적어 많은 공감을 얻었다.

    그 4수생이 지금 한국과 중국, 일본을 뒤흔드는 한류 스타가 됐다. <별에서 온 그대>를 마치고 난 뒤, 중국에서는 전세기를 띄워 그를 프로그램에 초대했고 중국에서 찍은 광고 출연료만 200억 원에 달해 ‘200억의 사나이’라 불리기도 했다.

    “연기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이렇게 큰 사랑을 받으리라고 예상하지는 못했어요. 상상은 해봤죠. 그런 날이 온다면 어떨까. 그렇게 마냥 행복하기만 한 건 아닌 거 같아요(웃음).”

    김수현은 최근 볼링에 푹 빠져 있다. 소속 회사에서 반대만 하지 않는다면 프로 시험에 다시 한 번 응시할 생각이다. 그는 촘촘하게 세워져 있는 모든 핀이 쓰러져 사라질 때의 쾌감을 좋아한다. 스트라이크를 칠 때의 기쁨은 1번, 2번, 3번, 4번이 쌓일 때마다 증폭된다. 그만큼 확률은 낮아진다. 앞의 스트라이크는 뒤의 스트라이크를 보장해주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가 참여한 작품이 스트라이크였다고 해서, 앞으로의 작품도 그러리라는 보장이 없다. 볼링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도무지 처리할 수 없을 것 같은 핀들을 처리했을 때다. <리얼>은 그에게 ‘스플릿(볼링의 핀이 한 번에 처리할 수 없게 난해하게 남은 상황)’이었다. 그의 투구가 명징한 스페어를 만들어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이런 난해함을 다룰 줄 아는 힘은 갖게 됐다.

    배우 김수현이 아시아에서 갖는 힘은 하나의 기업에 버금간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숫자로 환원된다. 인간 김수현에게 그 숫자는 짐이고 산이었다. 이번 작품이 그가 가진 어떤 것들을 소진시키고 태울지도 모른다. 한쪽에서는 벌써 그가 입을 타격과 차기작을 근심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배우 김수현에게는 위기일지 몰라도 인간 김수현에게는 아니다. 그는 이제 모든 것을 불태웠고, 힘이 꺼진 만큼 자유로워졌다. 그러니 근심은 이르다. 인간 김수현의 행복은 다시 배우 김수현의 저력이 될 테니까.
    • CP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