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철의 꽃이야기] 분꽃, 오후 4시면 피어나는 추억

    입력 : 2017.07.27 03:12 | 수정 : 2017.07.27 15:09

    여름 내내 고향 화단 장식한 꽃… 붉은색·노란색 등 색깔도 다양
    옛 여인들, 흰 가루 얼굴에 발라… 어머니들은 분꽃 피면 저녁 준비
    400여 년 민족과 함께했지만 마당 줄면서 요즘엔 보기 힘들어

    김민철 사회정책부장
    김민철 사회정책부장
    최은영의 중편 '쇼코의 미소'는 소유와 쇼코라는 한국과 일본의 두 여고생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어른으로 성장해가는 이야기다. 두 여성은 여고 시절 학교가 자매결연을 한 인연으로 만나 대학, 취업 시기까지 삶의 굴곡과 고민을 나눈다. 할아버지와 같이 사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이 소설에서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는 곳은 소유가 일본으로 쇼코를 찾아가 만나는 장면이다. 이 대목에서 분꽃이 나온다.

    〈그곳에는 분꽃을 심어놓은 작은 마당과 반질반질한 나무마루가 있었다. 쇼코는 퓨즈가 나간 것 같았다. (중략) 쇼코는 두 손으로 마루를 짚고 내 옆으로 다가왔다. 나는 쇼코를 쳐다보지 않고 마당에 핀 분꽃에만 시선을 줬다.(중략) 나는 쇼코의 말에 놀라서 노인의 얼굴을 쳐다봤다. 노인은 눈에 도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돌려 분꽃을 보는 척했다.〉

    이 소설에 분꽃이 여러 번 나오는 것으로 보아 작가가 의도적으로 배치한 것은 틀림없다. 시든 분꽃이 우울증에 시달리는 쇼코와 닮은꼴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젊은 작가의 소설에서 배경으로 쓰인 꽃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일이었다. 최은영은 요즘 주목받는 젊은 작가다. '쇼코의 미소'도 담담한 필체로 쓴 이야기가 감동적이었다. 특별한 사건이 생기지 않는데도 다음 일이 궁금해 한 번에 다 읽을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이 소설의 바탕에 깔린 청년 실업, 고령 사회 등에 관심이 가기도 했다.

    분꽃은 6월부터 피기 시작해 9월 정도까지 한여름 내내 볼 수 있는 꽃이다. 분(粉)꽃이라는 이름은 화장품을 구하기 어려운 시절 여인들이 씨 안에 있는 하얀 가루를 얼굴에 바르는 분처럼 썼다고 붙인 이름이다. 분꽃의 색깔은 붉은색·노란색·분홍색·흰색 등 다양하다. 한번은 이 중 노란색이 제일 예쁜 것 같아 노란색 분꽃 씨를 심어보았다. 그런데 다음 해 기대와 달리 붉은색 꽃 위주로 피어 실망한 적이 있다. 원래 분꽃의 꽃 색 유전은 멘델의 법칙 중 중간유전(불완전 우성) 적용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분꽃은 여러 꽃 색 유전자가 섞이면서 한 그루에서 붉은색, 노란색 꽃잎이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 두 색이 같이 있는 꽃잎, 두 색이 점점이 섞인 꽃잎까지 나온다고 한다.

    [김민철의 꽃이야기] 분꽃, 오후 4시면 피어나는 추억
    /김현지 기자
    분꽃은 재미있는 점이 참 많은 꽃이다. 소설에서 낮에 마당에 분꽃이 피어 있었다면 해 질 녘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분꽃은 해가 뜨면 꽃잎을 오므렸다가 오후 4~5시쯤부터 다시 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어 이름이 '4시꽃(Four o'clock flower)'이다. 시계가 없던 옛날에 우리 어머니들은 이 꽃이 피는 것을 보고 저녁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나팔꽃과는 정반대다.

    박완서 소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에 이와 관련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그 여자가 어렸을 적 저녁 나절이면 한꺼번에 피어나는 분꽃이 신기해서 어떻게 오므렸던 게 벌어지나 그 신비를 잡으려고 꽃봉오리 하나를 지목해서 지키고 있으면 딴 꽃은 다 피는데 지키고 있는 꽃만 안 필 적이 있었다. 그러면 어머니는 웃으며 말했었다.

    "그건 꽃을 예뻐하는 게 아니란다. 눈독이지. 꽃은 눈독 손독을 싫어하니까 네가 꽃을 정말 예뻐하려거든 잠시 눈을 떼고 딴 데를 보렴."

    어머니 말대로 했더니 신기하게도 그동안에 꽃이 활짝 벌어졌던 기억이 왜 그렇게 생생한지….>

    가을에 분꽃 아래에 검은 환약같이 생긴 씨앗이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열매를 가져다 심으면 다음 해 봄 십중팔구 싹이 날 것이다. 발아율이 아주 높고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 가꾸기 쉬운 꽃이다. 그래서 가을에 분꽃 씨앗이 보이면 주머니에 넣고 다니다 사람들에게 심어보라고 주기도 했다. 싹이 트면 처음엔 콩팥 모양으로 쌍떡잎이 생긴 다음, 달걀 모양으로 끝이 뾰족한 잎들이 나오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산에 가서 운이 좋으면 꽃송이들이 분꽃처럼 생긴 분꽃나무를 볼 수 있다. 연분홍 꽃 색과 맑은 꽃향기가 참 좋은 나무다.

    분꽃은 남미 원산의 원예종 식물이다. 어릴 적 화단이나 장독대 옆에는 맨드라미, 채송화, 봉선화, 나팔꽃과 함께 분꽃 한두 그루가 자라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많은 추억을 준 꽃이다. 고향 여자애들은 분꽃 아랫부분을 쭉 빼서 귀걸이를 만들었다. 최경 국립수목원 박사는 "분꽃은 17세기 전후 국내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400여 년 우리와 함께해온 꽃이지만, 요즘엔 마당이 줄어서인지 전처럼 흔하게 보이지 않는다. 분꽃은 그대로인데 분꽃을 볼 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인물정보]
    "박완서 '나목'은 이 영화에서 비롯됐다"
    분꽃
    분꽃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