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여성신문에 쇼킹한 뉴스가 떴다. 제목은
외국에 거주하는 필자가 기고한 형식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첫문단 이후 이 필자는 자신이 16세 때 겪었던 과거, 좋아하던 오빠로부터 시작해 동네 오빠들에게 집단적으로 강간을 당하고 마침내 그게 소문나 큰 상처를 입은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제목에서 이어지는 이 충격적인 ‘고백’에 어안이 벙벙했다. 한 번 더 차분히 읽어보면서 탁현민의 ‘그 여중생’이 쓴 글이 아니라는 걸 알게됐다. 즉, 이 글을 쓴 이는 탁현민씨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여중생과 첫 경험을 가졌는데…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서 어떤 짓을 해도 상관 없다, 그녀를 공유했다(‘말할수록 자유로워지다’ 책 중)”고 밝혔던 그 여중생이 아니었던 것이다.
흔히 말하는 ‘낚시 제목’에 기자도 속고 말았던 것이다.
탁현민 씨는 ‘그 책에서는 나쁜남자 컨셉으로 얘기했다’ ‘여중생 얘기는 지어낸 것’이라고 설명했지만, 여론은 쉽게 그의 말을 믿거나 용서해주지 않고 있다. ‘거짓말이었다’고 넘어가려는 태도는 더 후진적이다. 공직자에게 ‘거짓말’은 ‘나쁜짓’과 똑 같은 비중으로 악행이다. 그의 여성관이 ‘청와대 의전비서실 수석행정관’이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단을 다수가 하고 있다. 그러면서까지 탁현민 씨를 고집하는 청와대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사람도 적지 않다. 기자 생각도 그렇다.
‘여성신문’은 특히나 탁현민 씨의 여성관에 대해 줄기차게 문제를 제기해왔다. 여성의 권익과 의식을 깨치는 데 이 신문이 기여한 바 역시 적잖다.
그러나 여성신문은 이번에 한 여성의 쉽지 않은 ‘고백’을 그 자체의 문제로 드러내서 보여주는 대신 ‘탁현민 저격’에 이용했다. 반칙이다. “글을 잘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는 변명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라고 했지, 이라고 하지는 않았다”고 항변하는 건, 깨알만한 글씨의 서류뭉치에 싸인하게 하고 돈을 가져가는 ‘약관 사기꾼’과 같은 방식이다.
탁현민의 과거를 비판하는 건 개인과 어느 집단의 자유로운 선택이다.
그리고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강제성추행이나 강간이 일어난다.
그렇다고해서 이런 식으로 탁현민을 돌려치기 하는 건 또 다른 폭력이다.
설령 필자가 그렇게 제목을 달아왔다고 해도, 그건 바꾸는 게 옳았다.
이슬람 풍자만화를 그렸다가 살해당한 샤를리 엡도 이후 "내가 샤를리다" 하는 피켓을 들고 시위한 예가 있었다. 그러나 피켓을 든 사람이 샤를리 엡도가 아니란 것 누구나 안다.
그러나 이 글을 제목을 그렇게 게재함으로써, 독자의 혼란을 의도적으로 혹은 실수로 유발하고, 보는 이의 생각을 처음부터 특정 '프레임' 안에 넣는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나쁜 이들을 탁현민씨로 오해받게 만들자는 게 그 필자의 생각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여성은 그저 어렵게 자기 얘기를 썼을 뿐이다. 편집 과정에서 바꿈이 옳았다.
컬럼 제목이 논란이 되자 여성신문은 26일 밤, 로 제목을 바꾸고, 그 경위를 설명했다.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독자에게도, 탁현민 씨에게도 사과하는 게 맞다. 그리고 나서, ‘탁현민 사퇴’ 운동을 계속 벌여도 된다. 그리고나면, 오히려 더 당당해질 것이다.
여성들도 "그동안 여성이 당해온 게 얼마인데, 탁현민 하나 당하는 게 뭐가 대수냐" 같은 '쉴드'는 치지 말아야 한다. '남성은 메이저이고, 여성은 소수, 마이너'라며 소수자의 폭력성은 좀 눈감아 줘도 생각하고 싶어 나온 말이다. '남성의 보편적 악행'을 한 개인의 책임범위를 넘어가는 수준으로 대속(代贖) 시켜서는 안된다.
메이저의 사악함은 추하고, 마이너의 사악함은 부끄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