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갑자기 욱해서 "사장 불러!"… 을의 숨은 얼굴 '갑질'

조선일보
입력 2017.07.22 03:02

갑질의 심리학

100일간 6000건 적발
40~50代·남성·무직 많아… 약해졌다고 느꼈을 때 쉽게 무너지는 경향

평범한 사람들이 왜?
남의 무능 꾸짖는 사람 상당수가 열등감 시달려… 피해자·가해자 모두 갑질인지 인식 못하기도

국내 한 대기업 부장으로 있는 40대 중반 남성 A씨는 최근 가족과 함께 외식을 했다가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 놀랐다. 종업원이 늦게 온 다른 테이블에 먼저 음식을 가져다준 게 화근이었다. 평소라면 "우리도 어서 가져다 주세요" 한마디 하고 넘어갈 일이었다. 그날 A씨는 종업원에게 "왜 나부터 안 줘?"라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놀란 가족들이 A씨를 뜯어말릴 때까지 그는 "사장 부르라"며 집요하게 종업원을 괴롭혔다. 그의 느닷없는 '갑질'에 가족들은 상처받았고 스스로 교양인이라 생각했던 A씨 역시 충격을 받았다. 요즘 작은 일에 욱하고 이유 없이 화가 치밀어 잠도 잘 못 잤던 A씨는 신경정신과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평범한 당신의 다른 얼굴

지난 13일 이장한 종근당 회장이 수행기사들에게 폭언한 녹취록이 공개되면서 갑질 논란에 다시 한번 불이 붙었다. 지난해 미스터피자 창업주인 정우현 회장이 경비원을 폭행한 사실이 알려졌을 때, 2014년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 이른바 '땅콩 회항'을 했을 때도 여론은 들끓었다. 사태는 모두 해당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갑질을 일삼는 사람들의 내면엔 어떤 괴물이 있을까? 전문가 다수는 "갑질은 돈과 권력을 가진 특권층, 혹은 성격상 장애가 있는 일부 사람만 하는 게 아니다. 평범한 사람도 손님 입장에서 충분히 가해자가 될 정도로 갑질은 일상적 현상"이라고 했다.

식당에서 갑질을 했던 A씨는 최근 직장 내 승진에서 미끄러진 일이 있었다. 이용석 정신건강의학 전문의는 A씨 사례에 대해 "갑질을 하는 사람 내면을 파헤쳐 보면 무기력과 좌절감,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이 지닌 부정적 감정을 남에게 던져버리는 게 갑질의 본질이다. A씨는 승진 탈락 후 위축된 상황에서 남에게 권력을 휘둘러 우월감을 확인하려고 한 것"이라고 했다. 다른 사람을 무능하고 게으르다고 몰아붙이는 사람의 상당수는 스스로 열등감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은 지난해 9월부터 100일간 '갑질 횡포 특별단속'을 했다. 적발된 6000여건을 분석했더니 갑질 가해자는 '40~50대(57.7%)' '남성(89.6%)' '무직·일용직(27.1%)'이 많았다. 이용석 전문의는 "현재 한국 중년 남성은 성취지향성이 강하고 남자는 과묵해야 한다는 사회 분위기에서 자라 정서적 불안을 건강하게 풀어내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며 "병원을 찾는 중년 남성 환자 상당수가 건강검진 결과나 인사이동 등 일상적 변화가 원인이 돼 우울증과 불안장애를 호소한다. 힘이 약해졌다고 느낄 때 다른 성별과 연령대보다 쉽게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김학진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그 욕구가 과도한 사람은 자신이 무시당하는 듯한 상황에서 갑질을 하게 된다"며 "갑질 가해자 중 무직 비율이 높은 이유도 인정 욕구를 채우고자 하는 심리 때문"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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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이철원
◇"갑질은 열등감을 타인에게 던지는 것"

갑질은 한국인 정신건강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최근 중앙정신보건사업지원단이 갑질과 정신건강 사이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보고서 '갑을관계―일상에서의 상처와 트라우마'에 따르면 갑질과 관련해 사람들은 분노, 억울, 화, 짜증, 예민함, 우울감, 무기력 등의 감정을 느끼는 것으로 조사됐다. 특히 업무 현장에서 상습적 갑질에 노출된 이들의 의욕 상실이 심각했다. 흥미로운 점은 갑질 현장에서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 그것이 갑질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정신과 전문의 정찬승 마음드림의원 원장은 "우울증을 호소한 환자들과 상담하다 보면 갑질 피해 경험이 원인인 경우가 많다. 갑질을 처음 당한 사람은 자신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하고 무력감을 느끼게 된다. 갑질을 당한 경험이 이에 저항할 수 없는 심리 상태를 만드는 악순환이 일어난다"고 했다.

박지영 상지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갑질은 사회 전체에 전염된다. 대기업 하청업체 대표가 갑질을 당한 후 자기 회사 직원들에게 분풀이하거나, 직장에서 상사에게 모욕을 당한 직원이 악성 소비자로 변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며 "사람들이 갑질에 분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일상에서는 갑질 문화에 수긍하고 이를 용인하는 분위기가 있다. 만행이 드러난 수퍼갑에게 분노가 쏠리는 현상은 그만큼 을의 입장에서 불평등을 경험한 이가 많다는 뜻"이라고 했다. 갑질을 당한 사람들이 "나도 갑이 돼서 똑같이 하겠다"고 마음먹는다는 것이다.

정찬승 원장은 "한국인은 식민, 독재, 양극화를 겪으며 힘이 있어야 살아남는다는 권력 콤플렉스를 강하게 내면화했다"고 말했다. 정 원장은 "자신의 직업·직위와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하지 말고 위계질서에서 자신을 떨어뜨려 보는 연습이 필요하다. 저항하지 못한다면 일단 그 상황을 빠져나오는 것도 방법"이라며 "어려서부터 모든 개인이 가치 있다는 평등의식을 심어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김학진 교수는 "인정 욕구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풀어야 한다. 이를테면 겸손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가치가 되면 사람들은 자신을 낮추며 인정 욕구를 채우고자 할 것"이라고 했다. 전중환 경희대 교수(진화심리학)는 "인간 역사 대부분은 평등한 사회였다. 원시 사회에서 사람들은 윗사람이 억압하면 을끼리 뭉쳐 갑을 쫓아내는 식으로 권력을 통제했다"며 "인간의 본성은 지나친 갑질에 맞서도록 진화했다"고 했다.

갑질 때문에 상처받았다면 정신과 의사들이 권장한 다음 처방들을 참고해도 좋다. "복권에 당첨된 사람은 상사의 질책을 웃어 넘길 수 있다. 회사 밖에서 자신만의 내적 자원을 찾아라."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동료나 가족에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한 후 갑질한 사람을 마구 욕해라." "을의 가면을 벗어 던져라. 피해 의식은 비참함만 키운다. 윗사람에게 항의해도 생각보다 큰일이 일어나진 않는다." "도저히 못 참겠으면 꼭 병원에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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