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내 청춘에 핑계는 없다

    입력 : 2017.07.22 03:02

    [송혜진 기자의 느낌]

    세계 디자인 업계가 탐내는 '코리안 루키' 권투 선수 출신 가구 디자이너 문승지

    열다섯 살이던 2006년 겨울, 중학교 2학년이던 문승지는 병원에 누워 있었다. 중증 혈소판감소증이었다. 피가 자꾸 묽어지는 병이다. 의사는 "신체 장기 중 지라(비장·脾臟)를 떼어내야만 살 수 있는데, 수술 성공 확률은 30% 정도"라고 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뒤 제주 한림 할머니네 초가집에 얹혀살던 처지였다. 궁핍한 환경에 수술비가 있을 리 없었다. 며칠 뒤 소년은 수술을 받고 입원실에서 깨어났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술비는 어찌했는고?" 어머니가 대답했다. "남편 주변 사람들, 동네 이웃들이 한푼 두푼 모아줬어요…." 승지는 얼른 자는 척 눈을 감았다. 심장이 방망이질 쳤다. 살았다는 안도감, 수술비도 내지 못하는 형편에 대한 부끄러움… 갖가지 감정이 소용돌이가 돼 밀려왔다. 뜨거운 눈물이 귓바퀴로 떨어졌다. '꼭 성공해야지. 우리 집 언젠가는 내가 꼭 일으켜 세워야지.' 어린 승지는 그렇게 눈을 감고 스스로 속삭였다.

    11년이 흐른 올 4월, 간송재단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훈민정음과 난중일기―다시 바라보다' 전시를 열었다. 울퉁불퉁하고 흰 기둥벽이 전시장에 빽빽했다. 관람객들은 그저 벽인 줄 알고 지나치다 무심코 천정에 달린 볼록거울을 바라보고는 놀랐다. 이 기둥벽들 윗면이 이어져 한글 문장을 나타내고 있는 모양이 비쳤기 때문이다. '가까이 있어 보이지 않던 소중함'이란 글씨였다. 한글이라는 존재가 우리에게 그렇다는 의미를 쉽고도 기발하게 담아냈다. 26세 문승지 작품이다. 유학파도 아니고 국내 유수의 디자인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요즘 전세계 디자인 회사들이 가장 탐내는 '이단아'로 꼽힌다.

    18일 문승지를 그의 서울 문래동 집에서 만났다. 몹시 무더운 한낮, 문승지는 자신의 명치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릴 적 수술 자국이 여기 길게 남아 있어요. 돌아보면 그때 죽을 수도 있었던 그 수술의 기억이 학벌 없고 돈 없는 저를 지금껏 달리게 만들었죠." 말을 마친 그가 얼굴을 쓱 문질렀다. 닦아낸 것이 땀인지 눈물인지 알기 어려웠다.

    문승지는 권투를 그만뒀지만 여전히 자주 권투를 한다. 수술 이후 약해진 몸을 다스리기 위해서다. 그래도 문승지는 해맑다. “저처럼 하고 싶은 대로, 내키는 대로 살면서 이렇게 행복할 수 있다면 그 또한 기적이 아닐까요.” 지난 18일 서울 문래동 집에서 만난 문승지는 최근 내놓은 의자 작품 ‘이코노미컬 체어’를 앞에 두고 권투 글러브를 낀 손을 휘두르며 ‘헤헤’ 웃었다. 영락없는 26세 청춘의 얼굴이었다. /오종찬 기자
    돈도 '빽'도 없던 제주 소년

    ―원래는 권투를 했다죠.

    "초등학생 때는 씨름 선수였고요, 중학교 들어가서 권투를 시작했죠. 아마추어 대회에 나가서 몇 번 상도 받았고요. 그때만 해도 가족들은 운동으로 성공하길 바랐죠. 디자이너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죠."

    ―권투를 그만둔 이유는 수술 때문인가요.

    "그렇죠. 그때 그렇게 꿈을 잃어버리고 꽤 오래 헤맸던 것 같아요. 친구들과 학교 수업 땡땡이치고 PC방 같은 곳으로 놀러다녔고 걸핏하면 패싸움도 하고 그랬죠."

    고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방황은 계속됐다. 건축 공사 현장에서 막노동했고 PC방 아르바이트도 했다. 포장마차에 손님 끌어오는 '삐끼'도 했다. 하루는 미술학원에 전단을 돌리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전단 내용은 이랬다. '계원예대 2010년 신입생 모집. 내신·수능 성적이 아닌 면접으로만 입학 심사.' 문승지는 이런 생각을 했다. '성적을 안 본다니, 그럼 나도 원서 한번 넣어볼까?'

    ―지원한 데가 감성경험제품디자인과(현 리빙디자인과)였죠. 권투하던 학생이 왜 디자인과를 택했죠?

    "제가 낙서 하나는 잘했거든요(웃음). 그림 그리는 것을 원래 좋아하니 한번 쳐본 거죠. 당시엔 대학보다 제주 탈출이 목표였어요. 남들은 바다가 탁 트여 있어서 좋다며 일부러 찾아오는데 저는 정반대였어요. 제주 바다에 내가 갇혀 있다고 느꼈죠. 어떻게든 서울에 가고 싶었어요."

    입학 전형 면접은 3차까지 이어졌다. 교수들 앞에서 다른 학생들이 쭈뼛쭈뼛 말을 꺼내지 못하는 걸 본 문승지는 답답한 나머지 면접을 '진행'했다. "저기 저분은 어디서 오셨다고 했죠? 지금 이 의견에 대해서 할 말 없으세요? 옆에 계신 분은요? 또 말씀하실 분 없으신가요?" 문승지는 그해 장학금 100만원을 받고 계원예대에 입학했다.

    ―1학년 때 이미 전시회를 했다면서요.

    "졸업전시회를 한번 흉내 내서 해봤어요(웃음). 여의치 않은 집안 형편에 들어온 대학이니 잘해보고 싶었거든요. '다들 왜 대학을 다닐까'를 알고 싶더라고요. 선배들 붙들고 물어보니 졸업전시회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게 대체 뭐길래 그러나' 해서 목공소 아르바이트로 100만원쯤 모았죠. 홍대 근처에 전시장 빌려서 선배들 하듯 인디밴드도 부르고 파티 음식 차려놓고 제가 만든 가구 몇 개 놓고 전시를 했는데, 당연히 망했어요(웃음). 친구들 몇 명 와서 우리끼리 박수 치고 끝났죠. 그런데 그걸 마치니까 이상한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나는 졸업이 아닌 졸업 이후를 준비해야겠다'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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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①2015년 9월 런던에서 해외 유명 디자이너들과 함께 나란히 패션회사 ‘코스’의 광고 촬영을 한 문승지(왼쪽). ②그의 앞에 놓인 것이 합판 한 장을 잘라서 만든 ‘포 브라더스 체어’다. 쓰레기가 하나도 나오지 않도록 디자인했다. 올해 한국에 돌아온 문승지는 인테리어 디자인도 시작했다. “하고 싶은 일이 자꾸 많아진다”고 했다. /문승지 제공
    문승지는 2012년 친구들(박용재·이강경)과 함께 '캣 터널 소파'라는 걸 만들었다. 소파 등받이에 양옆으로 구멍이 뚫린 관을 달아놓은 모양의 소파다. 사람이 의자에 앉아 쉬는 동안 고양이는 그 터널을 통과하며 놀 수 있게 한 것이다. 문승지는 "졸업하면 사업을 해야겠다는 구상까지 마치고 준비한 작품이었다"고 했다.

    ―졸업 전부터 사업을 준비했군요.

    "반지하 자취방에서 밤마다 혼자 앉아 졸업하면 뭘 할까를 고민했어요. '취직하면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하고 스스로 물었는데, 답이 잘 안 나오더라고요. 이번엔 '사업을 하면 집안을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라고 물어봤어요. 대답은 '확률은 반반이지'였죠. '확률이 그래도 반이나 된다? 그럼 한번 해봐야 하는 것 아냐?' 했죠(웃음)."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과 청년창업지원 대출 받은 돈으로 2012년 '엠펍'이라는 반려동물 가구회사를 차렸다. 개집과 소파를 결합한 '도그하우스 소파' 같은 문승지 대표작이 모두 이때 나왔지만 디자인과 사업은 영 다른 세계였다. 회사는 1년 반 만에 쫄딱 망했고 1억원 가까운 빚을 졌다. 반지하 자취방에서 나와 창문 없는 지하실로 이사했다. 하루 10만~15만원씩 받는 디자인 아르바이트를 해서 빚을 갚아 나갔다. 맨밥에 참치캔만 먹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느 날 밤, 문승지는 해외 디자인 사이트를 뒤지다가 우연히 기자들 이메일 주소를 발견했다. '내가 이들에게 연락해서 내 작품이 외국 잡지에 실린다면, 상황이 좀 바뀔 수도 있을까?' 그는 바로 실행에 옮겼다.

    ―몇 통이나 보냈죠?

    "600통이요. 영어 한마디도 못하던 시절이에요. 일단 우리말로 제 소개를 쓴 뒤 외국에 살다 온 친구를 불러 짜장면 한 그릇 사준 다음 '번역 좀 해달라'고 했죠. 그 번역 편지에 제 작품 포트폴리오를 첨부해서 전 세계 디자인 잡지·웹진 기자들에게 이메일을 돌린 거예요. '하나만 걸려다오' 빌면서요(웃음)."

    한 달쯤 지났을까. 해외 디자인 웹진인 '디자인붐'과 '디진'에서 그의 작품 '캣 터널 소파'와 '도그하우스 소파'를 소개했다.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이름을 올리고 싶어 하는 매체들이었다. 국내 신문들도 이 소식을 소개했다. 그리고 한 달쯤 뒤 문승지는 또 다른 이메일 두 통을 받게 됐다. 영국 신문 텔레그라프와 데일리메일에서 온 인터뷰 요청서였다.

    ―영어로 대답해야 하는데 어쩌죠(웃음).

    "그 친구 다시 짜장면 사줬죠(웃음). 한 줄 한 줄 불러주고 번역한 걸 보냈어요. 그랬더니 정말로 서면 인터뷰가 실렸더라고요!"

    문승지 인생은 이때부터 달라진다. 또다른 이메일이 도착한 그 한 달 뒤엔 많이 달랐다. 39개국 210개 매장을 거느린 글로벌 패션회사 코스(COS)에서 온 것이었다. '지금 영국으로 와줄 수 있나요? 당신 가구를 우리 전 세계 매장 윈도에 놓고 싶은데요.' 문승지는 이렇게 말했다. "근데 저는 그때 코스라는 회사가 뭐 하는 곳인지도 잘 몰랐어요(웃음)."

    2012년 만든 ‘도그 하우스 소파’. 팔걸이에 개집을 달았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영국으로 와달라는 코스의 요청을 받고 문승지는 겁이 덜컥 났다. '영어 한마디도 못하는 게 들통나면 이들이 나와 일을 하려고 할까?' 문승지는 꾀를 내서 이런 답장을 보냈다. '요즘 제가 일이 많아서 영국에 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대신 디자인 도면을 상세하게 만들어서 보내드릴게요.'

    ―그럼 도면만 보낸 건가요?

    "아뇨.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요. 도면과 함께 제작·조립 설명서를 책으로 만들어 보냈어요. 왜 이케아 가구 사면 들어 있는 설명서, 그것처럼요."

    코스 측은 문승지 아이디어와 열정에 감탄했고 그의 작품을 2013년 35개국 45개 도시 매장에 전시했다.

    ―그 이후 바빠졌겠군요.

    "그 이후로는 국내 기업과 외국 기업에서 연락이 많이 왔어요. 외국에서 연락 올 때마다 힘들었어요. 여전히 저는 영어를 못하는데, 그쪽에선 '당장 같이 일하고 싶다'고 하니까요. 그렇게 놓친 일이 한두 개가 아녜요."

    문승지는 결국 일을 접고 필리핀 세부로 갔다. 3개월짜리 스파르타식 영어 기숙학원에 등록했다. 그러나 학원에 들어간 순간 그는 '잘못 왔다'는 것을 알았다. 동양인 아이들만 잔뜩 있는 주입식 학원이었다. 아침 9시부터 저녁 6시까지 영어책을 통째로 외우게 하는 수업이 반복됐다. 갑갑하기 짝이 없었다. 문승지는 결국 어느 주말 밖에 나가서 페트병에 보드카를 잔뜩 채워 물인 양 친구들과 마시고 놀다가 걸려서 퇴학당했다.

    ―민망했겠는데요.

    "그 정도가 아니죠. 그대로 한국으로 돌아가기엔 너무 창피하더라고요. 한국 사람 한 명도 없는 필리핀 시골 마을로 기어들어가서 두 달을 더 버텼어요. 그쯤 지나고 나니 말문이 트이더라고요(웃음)."

    한국으로 돌아온 문승지는 더욱 활발하게 활동했다. 디자이너 이상봉과 협업했고 코오롱의 '래;코드', 팀버랜드, 서울시와도 일했다. 한국 디자인·패션 전문 매체에서도 그를 앞다퉈 소개했다. 그들은 문승지의 가구를 두고 '북유럽 스타일 디자이너'라고 했다. 정작 문승지는 의아해했다. '나, 북유럽은커녕 유럽도 안 가봤는데?'라고 생각하면서.

    ―다들 그렇게 소개해주면 '그런가 보다' 하지 않나요.

    "저는 또 그게 안 되더라고요. 내가 북유럽을 전혀 모르는데 사람들이 '북유럽 스타일'이라고 하면 어떻게 고개를 끄덕이겠어요. 안 되겠더라고요. 마침 한 덴마크 회사에서 프로젝트를 받게 됐어요. 그걸 기회로 대사관에 비자 신청을 했고 '아티스트 비자'를 받아냈어요. 그렇게 1년 반을 코펜하겐에서 지냈죠."

    제주 촌놈, 코펜하겐서 살다

    코펜하겐에서 1년 반 동안 문승지는 흘러가는 대로 살았다. 아침에 눈 뜨면 인스타그램으로 디자이너나 건축가를 검색했다. 그들에게 '나 한국에서 온 디자이너인데, 만나자'고 메시지를 보냈다. 커피숍·바·파티장에서 그들은 명함 대신 서로의 인스타그램을 확인하며 말을 텄다. 세계적 디자이너 헨리크 빕스코브, 가구 회사 '헤이' 창립자인 메테 헤이도 그렇게 만났다.

    ―헨리크 빕스코브랑 친구가 됐다고요?

    "알고 보니 같은 동네에 살더라고요. 이들과 매일 만나면서 얻은 교훈이, 유명한 사람도 그저 사람이더라는 사실이에요. 누굴 만나 기죽을 필요 없더라고요(웃음)."

    산다는 건 그럼에도 생활이다. 돈이 슬슬 떨어져 갔다. 북유럽 가구회사 몇 군데에서 마침 취직 제안이 왔다. '취직하고 몇 년 더 있을까' 고민할 무렵, 프랑스 유명 디자인회사 '봉수아 파리스' 대표인 레미 클레멘테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문, 너 코펜하겐에 있다며. 한번 볼까.' 두 사람은 그렇게 만나서 맥주를 마시며 인사를 나눴다. 슬슬 편해질 무렵 레미가 "네 계획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문승지는 "취직할까 해"라고 대답했다. 레미는 이렇게 대답했다. "실망이다, 너."

    ―왜 실망했다는 거죠?

    "'하나하나 스스로 네 것을 만들어가는 게 참 좋아 보였어. 그런데 이제 와서 남의 회사로 들어간단 말이지? 아직 젊고 더 도전할 수 있는데 왜 그래야 하지?' 그렇게 말했어요. 그 말을 듣고 깨달았어요. '맞아, 나는 젊지. 내가 돈이 떨어졌다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구나. 그래, 나는 더 부딪힐 수 있지!'하고요."

    그해 문승지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문래동에 디자인 스튜디오를 차리고 친구들과 작업을 시작했다. 문승지는 이렇게 말했다. "'외국에 살려 하지 말고, 외국과 일을 하자'고 맘먹었어요. 사는 곳은 이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아요. 코펜하겐이든 서울이든, 중요한 건 내 일을 하는 거죠."

    내 인생의 플랜 A

    문승지는 코펜하겐에서 사람들에게 '북유럽다운 게 대체 뭐냐'고 묻고 다녔다고 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아는 디자인, 촛불과 식탁 그런 것 말고요. 이런 디자인의 원천이 뭘까. 저는 그게 알고 싶어서 그곳에 갔으니까요." 한참 답을 찾아 헤맬 무렵, 한 가구회사 대표가 이런 말을 들려줬다. "그건 인생에서의 플랜 A와 플랜 B가 무엇이냐에 달린 문제일 거야."

    ―그게 무슨 말이죠.

    "가령 한국 사람들에게 플랜 A는요, 당장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야근하고 밤샘하고 몸을 혹사시키죠. 그걸 하다 하다 정 안 되면 택하는 게 플랜 B이고요. 반면 북유럽 사람들에게 플랜 A는 20년, 30년 후 내가 이루고 싶은 꿈이래요. 플랜 B는 그 꿈을 위해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들이고요. 한국 사람들이 당장 플랜 A를 살고 있다면, 북유럽 사람들은 하루하루 플랜 B를 살면서 차근차근 플랜 A를 향해 가는 거죠. 삶의 우선순위가 이렇게 다르니, 아이들을 위해 질 좋은 교육을 고민할 수 있고 매일 식탁에 모여 밥을 먹을 수 있는 거죠. 가구 디자인은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 것 중 하나예요.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내 삶이 다시 보였어요. 수술받고 다시 살아났으니 1분1초도 허투루 쓰고 싶지 않다고, '집안을 일으켜 세우겠다'고 스스로 닦달하면서 살았던 제 자신이요."

    ―그럼 문승지의 플랜 A는 이제 뭔가요.

    문승지는 뜻밖의 답을 했다. "제주 낡은 초가집…. 신문이 벽마다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 할머니 집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잘 고쳐 살고 싶어요. 할머니, 엄마, 아버지가 그곳에서 부르고 싶은 사람들 다 부르고 음식 실컷 나눠 먹고 하고 싶은 이야기 맘껏 하면서 다 같이 살 수 있는 집을 만들고 싶어요."

    ―문승지의 브랜드를 세우는 게 아니고요?

    "아뇨. 그건 플랜 B죠.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요." 문승지는 말을 멈추고 숨을 내쉬었다. "스무 살 땐 그토록 그곳을 도망치고 싶었지만, 결국 지금의 나를 낳고 키워준 그 제주 한림 바다와 내 가족, 그들과 얽히고설켜 살아가는 것, 이젠 알겠어요. 그게 제 플랜 A이고 그걸 위해 제가 성장하고 있다는 걸요." 말을 마친 청년이 씩 웃으며 다시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그가 닦아낸 것이 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지만, 하나만은 확실했다. 이 청년, 정말이지 보통 아니라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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