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립,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최진립 장군은 최치원 선생의 후손으로, 1568년 경주 현곡면 하구리 구미산 아래에서 참판공 최신보와 평해황씨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나 자랐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4월 21일 경주성이 함락됐다. 당시 25세였던 장군은 아우 최계종, 당숙 최신린, 최봉천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해 5월 27일 김호, 손엽, 권사악, 이눌 등의 의병장들과 힘을 합해 계연(김유신 장군묘 아래 경주 서천 일원)에서 왜적을 무찔렀다. 6월 2일에는 언양에서 경주로 쳐들어오는 왜적을 김기 의병장과 함께 열박재(충의당에서 울주군 두서면의 중간)에서 가로막았다. 7월 27일에는 경주 손엽, 권복시, 권사민 의병장들과 함께 영천성 수복 전투에도 참전해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결사대 100여 명을 이끌고 울산 서생포에 주둔 중인 적을 기습하여 전과를 올렸다. 장군은 이와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1605년(선조 38) 선무원종공신 2등을 받았고, 훈련부정, 도총도부사, 마량진 첨사, 경원 부사 등을 역임했다.
1636년 12월 13일, 병자호란을 일으킨 청나라 군대는 며칠 지나지도 않은 12월 16일에 인조가 피신한 남한산성까지 포위했다. 조정은 부랴부랴 각 도에 공문을 보내 임금을 지킬 것을 명령했다. 서울에서 거리가 가까운 충청도 관군이 가장 먼저 북으로 달려갔고, 최진립 역시 69세라는 많은 나이에도 군사를 일으켜 남한산성을 향해 진격했다. 그가 전장으로 달려가기 직전, 충청감사 정세규가 '늙어 전장에 나가기 마땅치 않다'고 했지만 장군이 "내가 늙어 싸워서 이길 수 없더라도 한번 죽어 나라에 보답할 수는 있다"고 했던 일화는 유명하다.
1637년 1월 2일, 청나라 장수 양고리(楊古利·양굴리)가 이끄는 적과 대치했다. 열세인 상황에서 최진립, 나성 현감 김홍익, 남포 현감 이경징, 금정 찰방 이상재 등은 포기하지 않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향토문화전자대전'은 이들이 '훈련이 부족하고 전투력이 미약한 소수 부대'를 잘 통솔하여 적과 대등하게 싸웠다고 표현하고 있다. 하루 종일 10여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이후, 아군은 탄약과 화살이 바닥나고 군사도 이미 반이나 잃었다. 최진립 장군도 결국 전사했다. '향토문화전자대전'은 '최진립도 공주 영장으로서 군사를 이끌고 험천 전투에 참여하여 용전하다가 장렬히 순절했다. 다음 해에 시체를 수습했는데 그 모양이 살아 있는 듯하고 화살이 고슴도치처럼 박혀 있었다고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름을 떨쳤던 장수 중 1636년 병자호란 때까지 생존한 이는 거의 없었다. 일본군 선봉장으로 참전했다가 이내 조선에 귀화한 김충선이 당시 63세의 고령으로 호란에 참전한 사실이 두드러지는 정도다. 그런 만큼 불과 25세의 나이로 임진왜란에 의병으로 참전했던 최진립 장군의 69세 병자호란 참전과 순절은 특별한 이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조선인이 되어 평생 나라를 지키다, 김충선(金忠善)]
해마다 음력 12월 27일에 열리는 최진립 장군 제일(祭日)에 경주 최씨 가문은 노비 두 사람의 제사도 지낸다. 장군을 모시던 노비의 제사다. '충노 두 분을 함께 제향한다'며 이는 '신분 구분이 엄격하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여러 양반들로부터 많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집안의 전통이 되었다'고 한다.(충의당 발간 홍보 자료 표현)
최진립 장군의 15대손인 서예가 최채량 옹은 충노각 앞에 친필로 직접 '主爲忠臣不爲忠奴乎(주위충신불위충노호)'라 쓴 빗돌을 세웠다. '主爲忠臣不爲忠奴乎'는 조선 시대의 경주 지리지인 충의편에 나오는 말로 '주인이 충신으로 나라에 몸을 바치려는데 어찌 충노가 되지 못하리오'라는 뜻이다. 이 문장은 용인 험천 전투*에서 장군이 자신을 평생 모시느라 환갑을 넘긴 두 노비에게 "너희는 집으로 돌아가 목숨을 지키도록 하라"고 명령했을 때 두 노비가 주인에게 대답한 말이기도 하다.
최진립, 전 생(生)을 바친 호국(護國)
* 청백리(淸白吏):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淸廉)·근검(勤儉)·도덕(道德)·경효(敬孝)·인의(仁義)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理想的)인 관료상으로, 의정부(議政府)에서 뽑은 관직자에게 주어진 호칭이다. 총 217명이 배출되었다. 대표적 인물로는 맹사성·황희·최만리· 이현보·이황·이원익·김장생·이항복 등이 있다. 후손들도 그 혜택을 받았다.
최진립, 후대의 이야기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99호인 충의당은 경주 최씨 종가로 최진립 장군이 살았던 집이다. 본래 당호는 흠흠당(欽欽堂)이었는데 1760년 무렵 건물을 고쳐 지으면서 집 이름을 충의당으로 바꾸었다. 충의당 일대는 '충의 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 위치: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이조3길 28-17
- 문의: 054-779-6079 (경주시 문화관광과)
- 지정 현황: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9호 (1993.02.25 지정)
용산서원은 최진립 장군의 충절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1699년(숙종 25)에 경주부윤 이형상이 지방 유림과 함께 건립했다. 1711년(숙종 37)에 '숭렬사(崇烈祠)'로 사액(賜額)* 되었는데, 이때 유림이 모여 용산서원으로 할 것을 합의했다. 그러나 1870년(고종 7) 대원군에 의해 훼철(毁撤)되었다가, 1924년에 재건되었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하정(下丁 · 세 번째 丁日)과 8월 하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용산서원에서 남서쪽 50m 지점에는 장군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신도비가 있다.
[[Why] '淸富'의 대명사 최부잣집 후손들 아직 부자로 살까]
■ 참고
국역 국조인물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충의당 발간 홍보 자료
한국관광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