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폭염 난민, 학교 도서관·카페로…"쪄죽을 것 같아 집 나왔어요"

    입력 : 2017.07.15 03:02

    '무더위와의 전쟁' 벌이는 자취생·저소득자·쪽방촌 노인들

    이미지 크게보기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올해 초 서울 서촌에 신혼집을 장만한 김세훈(32)씨는 지난 4월 에어컨 매장에 갔다가 "8월 말까지 예약이 꽉 차 있어 그 이후에야 설치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구입을 내년으로 미뤘다. 지난 주말 김씨는 아내와 함께 온종일 광화문에 있는 대형서점과 카페를 전전했다. 1시간까지 주차요금이 무료라 카페만 여러 군데 옮겨다녔다고 했다. 김씨는 "지난달부터 부부 모두 (에어컨이 있는) 회사에서 자발적 야근을 하고 있다"며 "아내와 여름 한 철만 각자 본가에 들어가 주말 부부를 하자는 얘기를 진지하게 할 정도"라고 했다.

    서울 은평구 원룸 주택에 살던 전수정(여·28)씨는 최근 계약 기간이 몇 개월 남았지만 부동산 중개료를 물어가며 전셋집을 옮겼다. 현관문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사는 앞방 남자가 초여름부터 더위를 이기지 못해 문을 열어놓고 지냈기 때문이다. 전씨는 "집에 들어갈 때마다 불쾌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었다"며 "문을 닫아달라고 하기엔 너무 더워 차라리 집을 옮기기로 했다"고 말했다.

    무더위를 피해 집을 떠나는 '폭염 난민'이 늘고 있다. 최근 서울연구원에서 시민 1000명에게 "작년 여름 집에 냉방기기가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약 10%가 "없었다"고 답했다.

    대학가 2030도 '난민' 대열에

    작년보다 열흘 빨리 첫 열대야(熱帶夜)가 나타난 12일 밤 1시, 서울 대학로 한 24시간 카페는 담요를 덮고 테이블에 엎드려 자는 청년들로 붐볐다. 이날 서울 지역 최고 온도는 31도였다. 냉방을 하고 있는 카페 안은 20도로 쌀쌀한 기운이 돌았다. 운동복 차림으로 엎드려 있던 한모(25)씨는 "집에서 잠을 자려고 누웠는데 한 시간 이상 뒤척이다 결국 나왔다"며 "열대야가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폭염 때문에 학교 도서관이나 카페에서 쪽잠을 자고 있다"고 했다. 한씨는 "에어컨이 있는 풀옵션 원룸은 가격에 비해 집이 좁아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왔다"며 "2년마다 이사 다니는데 그때마다 에어컨 설치비가 들고 전기료도 부담스러워 여름 동안 매일 커피 값을 내는 게 낫다"고 했다.

    서울 종로구에서 보증금 500만원에 월 30만원짜리 다세대 주택에 사는 고시생 전모(여·29)씨는 지난 6월 시험을 치르자마자 경기 성남의 부모님 댁으로 이사했다. 그가 사는 다세대 주택은 가정집을 원룸으로 쪼개 한 층에 네 가구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창문이 나 있지만 다른 건물이 가로막고 있어 거의 통풍이 되지 않는다. 전씨는 "합격 발표가 나는 8월까지 서울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도저히 더위를 견딜 수 없어 이사를 앞당겼다"고 했다. "밤마다 잠을 못 자서 아침 7시에 도서관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가 다섯 시간씩 엎드려 자곤 했어요. 시험을 앞두고 밤낮이 바뀌어 컨디션 조절을 못 했습니다. 집에서 잘 땐 속옷만 입고 자고 찬물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도 10분이면 물기가 바싹 말라 소용이 없었어요."

    전씨는 일찍이 부동산을 통해 집주인에게 에어컨을 달아달라고 요구했지만 "비용을 세입자가 부담하라"는 답만 받았다. 최근 집주인은 전씨가 이사를 가겠다고 하자 에어컨을 설치하고 월세를 5만원 올렸다. 요즘 같은 날씨에 에어컨이 없으면 방이 나가지 않기 때문이었다.

    지난 6월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청년 574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41%가 '지옥고'에 산 적이 있다고 답했다. '지옥고'는 '반지하·옥탑방·고시원'을 줄인 은어다. 이들에게 "지옥고에서 무엇이 가장 힘들었냐"고 묻자 '전월세비 부담(34%)', '채광·곰팡이 문제(17%)'에 이어 '여름엔 더욱 덥고 겨울엔 한없이 추웠다(16%)'고 답했다. 최근 몇 년 사이 대학가 주거난이 심각해지며 젊은 '폭염 난민'들도 늘고 있는 것이다.

    청년주거단체 '민달팽이유니온' 조현준 사무국장은 "간혹 환기구가 따로 없어 에어컨 설치 시 벽을 뚫어야 하면 집주인이 반대하기도 한다"며 "상경한 청년 대부분이 몇 년 단위로 집을 옮겨 다니다 보니 '올해만 참자' 하고 폭염을 견뎌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했다. 서울 한 구청 관계자는 "폭염 취약 계층을 위해 노인정이나 마을회관을 무더위 쉼터로 지정해 냉방 시설을 켜고 있지만 젊은 사람들이 들어가기엔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고 했다.

    보증금 마련이 어려운 이들이 주로 사는 대학가 고시텔은 에어컨 설치한 방이 더 비싸다. 신촌에 있는 한 고시텔은 개별 에어컨이 딸린 방은 월 3만원을 더 받고 있다. 이 고시텔 주인은 "과거엔 창문이 달려 있는 고시텔이 비쌌지만 3~4년 전부터는 개별 냉방 시설이 있는지가 월세를 정하는 요소가 됐다"며 "공용 에어컨을 쓰는 방은 총무가 조절해주는 온도에 따라 생활한다"고 했다.

    얼린 생수통 끌어안고 자는 노인들

    지난 11일 오후 4시쯤 서울 합정동 쪽방촌 대추나무 밑에는 주민 대여섯 명이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이곳은 주민들이 여름을 나는 쉼터 역할을 하고 있다. 이날 기온은 32도로 무더웠지만 "사는 방에 비하면 여기는 겨울"이라는 게 주민들 말이었다. 김영자(여·74)씨의 쪽방 문을 여니 더운 열기가 올라와 숨이 턱 막혔다. 창문이 없어 통풍은 전혀 되지 않았다. 김씨는 작년 여름부터 7월이 되면 다니는 교회에서 잠을 청한다. 김씨의 형편을 알게 된 교회에서 기도실 열쇠를 주고 7~8월 밤에는 그곳에서 자라고 배려해줬다. 김씨는 오후 8시쯤 집을 나서 다음 날 오전 10시가 넘으면 집에 들어온다. 그는 "6월 말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만한데 한여름이 되면 정말 자다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또 다른 주민 홍주화(여·83)씨 가슴팍엔 땀띠가 울긋불긋했다. 홍씨는 "쥐나 벌레가 들어와 문을 열어놓고 잘 수도 없다. 죽지 않으려고 옷을 다 벗고 얼린 생수통 두 개를 끌어안고 잔다"고 했다. "여름엔 지옥 불구덩이가 따로 없어요. 예전엔 겨울이 오는 게 두려웠는데 요즘은 폭염이 더 무서워요. 이제 막 시작인데 올여름은 또 어떻게 날지 모르겠어요. 비라도 오면 밖에 나가지도 못하고 방 안에서 더위와 싸워야 해요." 이곳 쪽방촌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고령자들을 위한 '무더위 쉼터'가 마련돼 있지만 관절염 등으로 거동이 불편한 독거노인들에겐 천리 길이나 다름없다.

    서울 종로 탑골공원 일대 패스트푸드점은 음료 한 잔을 시켜놓고 온종일 진을 치는 노인들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이중 한 곳을 찾은 한 노인은 "바깥 더위에 비하면 여긴 천국"이라며 "그나마 돈이 조금이라도 있으니 마실 거라도 시켜놓고 앉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서울연구원에서 낸 보고서 '2016년 서울시민의 폭염 경험'에 따르면 고령화 비율이 높은 구(區)는 온열질환으로 병원을 찾은 이도 많았다. 조사에 참여한 도시사회연구실 손창우 박사는 "나이가 들수록 체온 조절 기능이 떨어져 폭염에 특히 취약하며, 심장병 같은 기저질환이 있으면 더 위험하다"고 했다.

    무더위는 재난… 장기적 대책 필요

    더위에 가장 취약한 주거 형태는 옥탑방이다. 태양열을 고스란히 받아 콘크리트에 담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인 정지윤(32)씨는 지난해 10월 서울 송파구 한 옥탑방에 전세로 이사했다. 그는 지난 6월 옥상을 흰색 차열 페인트로 칠하는 '쿨루프(cool roof)' 시공을 했다. 그는 "루프톱 파티를 하겠다는 낭만을 갖고 들어온 집인데 여름이 다가오니 무서워졌다"고 했다. 기후변화 대응단체 '십년후연구소' 조윤석 소장은 "쿨루프 시공은 흰색 티셔츠를 입었을 때 빛을 더 잘 반사해 더위를 덜 느끼게 되는 원리"라며 "표면 온도는 20~30도, 건물 실내온도는 4~5도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폭염 역시 난방처럼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손창우 박사는 "같은 온도의 무더위라도 사회경제적 수준, 주거유형, 연령층에 따라 민감도가 다르다"며 "폭염 취약 계층이나 에너지 빈곤층에 냉방비 지원을 하는 동시에 복사열을 낮출 수 있게 도시 설계를 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지난 40년간 서울시 평균 기온이 2도 올랐다"며 "5~10년 주기로 기록적인 폭염이 찾아오고 있기 때문에 이제 무더위는 재난 관리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는 문제가 됐다"고 말했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