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에 귀 기울여 본 적 있나요"

    입력 : 2017.07.11 03:01

    - 미디어아트 거장 보디츠코 인터뷰
    노숙자·이민자 등 약자 소리 대변
    국립현대미술관서 亞 첫 회고전… 新作 '나의 소원' 촛불시위서 영감
    "광장의 무한한 힘 느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3년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전쟁의 폐허에서 자랐고, 자주 혼자였다. 폴란드 국립오케스트라 지휘자이자 예술감독이었던 아버지,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는 너무 바빴다. 군인이 버리고 간 무기를 가지고 벙커에서 놀았다. 가끔 아버지의 리허설을 보았다. 총성 사이로 들려오던 어머니의 피아노 선율은 아름다웠다. 크지슈토프 보디츠코(Wodiczko·74)는 "나는 전쟁과 예술, 그 틈바구니에서 자랐다"고 했다.

    지난달 29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만난 크지슈토프 보디츠코가 바르샤바 시절인 1973년 발표한‘수레(Vehicle)’를 쓰다듬고 있다.
    지난달 29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만난 크지슈토프 보디츠코가 바르샤바 시절인 1973년 발표한‘수레(Vehicle)’를 쓰다듬고 있다. ‘연단’‘노숙자 수레’‘자율방범차’등 작품에 유독 수레가 많은 이유를 묻자“생존의 도구이면서 변화와 희망의 가능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운호 기자
    미디어 아티스트 거장 보디츠코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연다. 지난 5일 개막한 '크지슈토프 보디츠코: 기구, 기념비, 프로젝션'은 한국에서의 첫 전시이자 대표작 80여점을 한자리에 모은 아시아 최초 회고전이다. 글로벌 미술 매체 아트넷(artnet)은 지난 5월 프리뷰에서 '여행을 가서라도 볼 만한 전시 19선' 중 하나로 이 전시를 소개했다.

    보디츠코는 노숙자, 불법 이민자, 원폭 피해자, 가정 폭력 피해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이 자기 목소리를 광장에서 떳떳이 발언할 기회를 만들어준 작품으로 세계적 명성을 쌓았다. 현미경 디자이너였던 그가 1968년부터 만들어온 '기구', '기념비', '프로젝션'(투사된 영상)들은 약자들의 대(對)사회적 호소, 소통의 도구로 기능하며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던졌다.

    이번 전시에도 나온 대표작 '노숙자 수레'는 그가 캐나다를 거쳐 80년대 말 미국 뉴욕으로 이주했을 때 제작한 작품이다. 쇼핑 카트를 개조해 그 안에서 잠도 자고 세수도 하고 음식도 해먹을 수 있는 노숙자용 거주 공간으로 만들었다. "노숙자들이 거리에 누워 있어도 뉴욕 시민들은 발아래 아무것도 없는 양 스쳐 지나갔지요. 트럼프 빌딩에 빈방들이 넘쳐나도 그들이 잠잘 곳은 없었어요." 90년대 초 선보인 '외국인용 지팡이'와 '마우스피스(대변인)'는 이민자들을 위해 제작한 기구다. 언어와 피부색이 달라 차별받는 이민자들에게 기괴하게 생긴 지팡이를 들리고, 투구처럼 생긴 마우스피스를 씌워 거리를 활보하게 한 퍼포먼스. "원주민들 눈에 이들 모습이 확 들어오게 함으로써 그들의 삶과 고통에 관심을 가져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보디츠코의 대표작‘노숙자 수레’(1988).
    보디츠코의 대표작‘노숙자 수레’(1988). 황금색 트럼프 빌딩과 수레를 미는 노숙자의 모습이 대비를 이룬다. /국립현대미술관
    보디츠코가 세계적으로 알려진 건 20여 국을 돌며 그 나라의 유명 건축물과 동상, 기념비 등에 영상을 투사한 작품들을 발표하면서다. 멕시코 가정 폭력 피해 여성들이 자신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털어놓는 '티후아나 프로젝션', 원폭 피해 생존자들의 인터뷰 영상을 히로시마평화기념관 외벽에 투사한 '히로시마 프로젝션', 중립국 스위스에서 더 가혹한 차별을 받는 미등록 이민자들이 "우리도 꿈꾸게 해달라"며 호소하는 영상을 바젤 쿤스트 뮤지엄에 쏘아 올린 작품들이 대표적. 개인의 자유 없는 공산사회에서 살다 서방에서는 이민자로서 차별을 당하기도 했던 보디츠코는 "타인이 겪는 고통의 깊이에 우리가 결코 닿을 수는 없지만 귀를 기울일 순 있고, 기울여야 할 의무도 있다"고 말했다.

    올해는 서울을 무대 삼아 신작을 발표했다. 3.5m 높이의 김구 선생 조형물에 외국인 노동자, 탈북 예술가, 세월호 유가족, 태극기 집회 참가자, 성 소수자 등 저마다 상처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망 영상을 투사한 '나의 소원'. 지난해 12월 광화문 일대에서 벌어진 촛불 시위와 태극기 집회를 모두 목격했다는 보디츠코는 "광장, 공적인 장소의 힘을 무한히 느꼈다"면서도 "둘 다 정의와 민주주의를 외치면서 두 집단끼리는 왜 소통하려 하지 않는지 의아했다"고 말했다. "광장이 힘있는 사람들에게 쓰이기 시작하면 더 이상 공공장소가 아닙니다. 집안 작은 식탁이라도 서로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억눌린 것을 분출하며 더 좋은 대안을 나눌 수 있다면 그곳이 진짜 광장이죠." 10월 9일까지. (02)3701-9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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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창올림픽, 미디어예술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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