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출신에 초·중·고등학교를 모두 대구에서 나온 김제호(27)씨는 대구의 '지역 인재'가 아니다. 2011년 서울 성북구에 있는 고려대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김씨는 대구·경북 지역에 본사를 둔 한국가스공사, 한국수력원자력, 한국도로공사에 지원하더라도 유리한 점이 없다. 반면 서울에서 태어나 대구·경북의 대학을 다닌 학생은 지역 인재가 된다.
새로 도입될 공공 부문 입사지원서엔 출신 지역, 학교, 전공, 학점 등은 적지 못하는데 최종 학교의 소재지는 적도록 돼 있다. '지역 인재 채용 할당제'를 적용할 지원자를 가리기 위해서다. 가령 강원도에 있는 대학을 졸업한 지원자가 강원도 원주에 본사를 둔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입사지원서에 대학 소재지를 적어 내면 지역 인재로 분류돼 우선 선발 대상이 된다. 김씨는 "학벌이나 외모, 출신지에 상관없이 실력으로 경쟁하라고 해놓고 실제로는 지방대에 간 사람들에게 더 특혜를 주는 방식은 공정하지 않다"고 말했다.
◇출신 학교 소재지만 중요
정부는 다음 달부터 모든 공공기관·공기업 채용에 블라인드 채용을 전면 도입한다. '입사지원서에 사진, 나이, 성별, 가족관계, 출신 지역, 출신 학교, 전공, 성적을 적지 못하게 하고 채용 면접에서도 면접관들이 지원자의 인적 정보를 알지 못하게 하자는 것이다. 지원자의 지연·혈연·학연을 따지지 않고 인성·실력 위주로 뽑겠다는 취지다.
그런데 지난달 22일 문재인 대통령이 "지방 혁신 도시로 이전한 공공기관이 신규 채용을 할 때 30% 이상은 지역 인재에게 할당하라"고 지시했다. 채용 과정에서 출신대·출신지 등을 배제하자는 블라인드 채용의 취지와 맞지 않는 모순이 생긴 것이다.
국내 최대 공기업인 한국전력의 경우 전체 임직원 2만1000여명 중 전남 나주 혁신 도시에 있는 본사에서 근무하는 인원은 1500여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전국 곳곳의 사업장에서 근무한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지시에 따르면 한전은 앞으로 신규 채용 인원의 3분의 1쯤을 전남이나 광주광역시 소재 대학 출신의 지역 인재로 채워야 한다. 근무지가 전국에 퍼져 있는데 전남·광주 지역 지원자들이 혜택을 받는 것이다.
이에 따라 '출신 학교 세탁'을 하는 경우가 생길 것이라는 목소리가 나온다. 건국대에서 공기업 취업을 준비 중인 김모(27)씨는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한 사람들이 '역차별'을 당하는 꼴"이라며 "지방 대학을 골라 편입하는 게 낫겠다는 이야기가 나온다"고 했다. 서울의 한 사립대 관계자는 "서울 소재 상위권 대학들은 큰 영향이 없겠지만 중·하위권 대학에선 지방 대학 편입이나 지방 대학원 석사과정에 지원해 최종 학교 소재지를 바꾸려는 학생들이 나올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문·사회 전공은 불리?
입사지원서에 출신 학교는 물론 전공·성적까지 적지 못하게 하는 것도 논란거리다. 정부가 제시한 새 입사지원서에 따르면 지원자는 전공은 밝힐 수 없다. 자신이 지원한 직무와 관련해 어떤 과목을 들었는지만 적을 수 있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 재학 중인 이모(28)씨는 "전공과목이 '문학 평론 쓰기' '글쓰기 이론' '문자학' 등이라 직무와 직접 관련된 수업은 사실상 없다"며 "경제나 경영을 전공하지 않은 문과 학생들은 공공 부문 취업을 생각도 하지 말라는 것인가"라고 했다.
서울대 인문대학 한 교수는 "학교생활의 전반적인 결과는 무시하고 무슨 과목을 이수했는지만 보겠다는 발상은 대학을 직업훈련원으로 만들자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의 한 교수는 "문과 학생들이 공공 부문 입사지원서에 적을 수 있는 상경계열 과목을 찾아 들으려 하지 않겠느냐"며 "경제·경영 전공으로의 쏠림이 더 심해지면서 인문계열 전공은 고사(枯死)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공공부문 블라인드 채용
공공부문 입사지원서에 사진·가족관계·출신지역·학교·전공·성적 등의 기재를 금지한 것. 대신 지원한 직무와 관련해 이수한 과목·교육과정을 기재.
☞지역인재 채용할당제
지방 혁신도시로 이전한 공공기관·공기업 채용 때 전체 인원의 30% 이상을 본사 소재지 광역자치단체에서 최종 학교를 졸업한 사람으로 채우는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