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창립 주도했다"

    입력 : 2017.06.30 03:04

    [신간회 학술대회]

    신간회 90주년·조선일보 지령 3만호 기념 학술대회

    - "사회주의자가 주도? 잘못됐다"
    당시 신문들 '純민족주의 단체' '민족주의 좌익전선 형성'보도
    "이념 다른 사회주의자와 연대 가능성을 열어뒀던 것"

    - 사회주의자 이탈로 해체
    "좌파, 일제 공작에 이용당해 민족주의 세력 무력화시켜"

    1927년 창립된 일제 치하 최대 민족운동 단체 신간회(新幹會)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협력한 '좌우 연합'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1980년대 이후 민중사관이 대두하면서 신간회 창립 과정에서 사회주의 세력의 역할을 강조하는 연구가 많아졌다.

    그러나 29일 신간회 창립 90주년과 조선일보 지령 30000호를 기념해 서울 YMCA회관 대강당에서 신간회기념사업회·한국민족운동사학회·조선일보사 주최, 방일영문화재단 특별 후원으로 열린 '신간회와 신간회 운동의 재조명'학술대회에선 신간회 창립 과정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가 제시됐다. 김인식 중앙대 교수는 발표문 '창립기 신간회의 성격 재검토'에서 신간회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인 민족주의 좌파 세력이 주도해 창립했다고 밝혔다. 신간회가 사회주의자들의 '반제(反帝) 협동전선론'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시각이 잘못됐다는 뜻이다.

    "비타협적 민족주의자가 창립 주도"

    김 교수는 "당시 신문(조선·동아·중외일보)들은 신간회가 '순(純)민족주의 단체'로서 발기했으며, 그 목표는 '우경적(右傾的) 사상'을 배척하고 '민족주의 좌익전선'을 형성하는 데 있다고 보도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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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만에 전국에 149개 지회, 회원 4만명 달해 - 신간회 경기도 광주 지회 회원들이 촬영한 사진. 신간회는 1929년 초 전국에 149개의 지회를 두었고 회원은 4만명에 달했다. /신간회기념사업회
    '순(純)'이란 사회주의 및 불순한 민족주의를 배격한다는 의미이고, '우경적 사상'이란 당시 대두하던 자치운동처럼 일제와 타협하려는 기회주의를 말한다.

    또 '민족주의 좌익전선'이란 사회주의나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협동'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 중에서 비타협주의 세력'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국 신간회 창립 주체들은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해 일제에 저항하는 비타협 세력이었으며, 타협주의 노선을 적으로 규정했다. 이 같은 목적을 위해 근본이념에서 차별되는 사회주의자와도 연대의 가능성을 열어뒀던 세력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창립 이후 사회주의자들이 가담하면서 신간회가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협동전선체로 발전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간회 구성에서 제외된 '자치파' 역시 당시 국내에서 상당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자치운동 전개 양상'을 발표한 조규태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회장(한성대 교수)은 "'동화형 자치파'는 많은 토지·기업·학교를 가지고 있었고, '분리형 자치파'로 불리는 종교 세력에는 수많은 교인이 있었다"고 했다.

    "사회주의자들, 일제 공작에 이용당해"

    신간회 주요 발기인들
    비타협적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협동전선'을 결성한 신간회는 사회주의자들의 이탈로 인해 1931년 해체된다. 종래 민족운동의 분열로 비판받았던 이 과정은 1980년대 이후 '동력을 잃은 협동전선 조직 대신 더 발전한 노동·농민 조직을 만들려는 시도'로 재인식됐다.

    이날 학술대회에서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는 발표문 '신간회 해체론 재검토'에서 당시 신문과 잡지에 발표된 신간회 해소(해체) 관련 논문 23편을 분석했다. 김 교수는 "사회주의자들의 신간회 해소 운동은 자신의 과거 동맹 세력을 적대 세력으로 간주하고 무력화하려는 전략 전술이었다"고 했다.

    해소 반대론을 펼친 민족주의자들은 더 큰 범위 또는 새로운 형태의 민족협동전선의 형성을 바라고 있었다. 그 선봉에 섰던 안재홍 조선일보사 사장 등은 사회주의자들이 내세운 '대중의 혁명성에 토대를 둔 협동전선'의 대의까지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해소에 찬성한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 내 '소(小)부르주아 계급'과 '민족주의 좌파'를 끝내 '무산계급의 적대 세력'으로 간주했고, '신간회를 대체할 만한 협동조직이 만들어질 때까지 해소를 유예하자'는 제안도 거부했다. 구체적 대안 미비로 충분한 여론을 확보하지 못한 채 이뤄진 신간회 해체는 일제 공작에 이용당한 결과가 됐다는 것이다.

    '1920년대 후반 민족 언론 세력의 정세 인식과 신간회 주도세력의 변화'를 발표한 윤덕영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은 "일제는 당초 민족주의 세력을 분열시키기 위해 신간회 창립을 허가했지만, 좌우의 거의 모든 정치 세력이 신간회로 집결하며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보고 태도가 바뀌었다"고 했다. 신간회 중앙지도부의 주요 세력이었던 조선일보를 탄압하며 '조선일보 사원의 신간회 탈퇴'를 강요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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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하 조선일보, 신간회와 '한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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