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보급·환경 캠페인·통일과 나눔… 사회를 바꿨다

    입력 : 2017.06.24 03:02

    [조선일보 지령 3만호]
    납북인 송환·정보화 운동도 큰 반향 일으켜

    캠페인

    신문은 그날의 주요 사건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알리는 보도 기능 외에도 우리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일을 사명으로 한다. '어젠다 세팅(의제 설정)' 기능이다. 조선일보는 1920년 3월 5일 창간 이후 시대가 요구하는 의제를 제시하고 우리 사회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해왔다.

    1922년 민립대학 운동은 교육을 통한 민족 독립운동이었다. 이해 12월 1일 자 사설 '조선민립대학 발기에 취(就)하야'를 통해 후진을 키우는 '교육 독립'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구한말 시작했던 민립대학 운동은 조선일보가 적극 보도하면서 본격 재개됐다. 민립대학 설립은 일제의 탄압으로 끝내 실패했지만 이후 민족 독립운동의 지표가 되고 단체 결성을 통한 전국적인 조직 경험을 쌓는 성과를 거두었다.

    문자 보급 운동과 향토 문화 조사 역시 우리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1929년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를 구호로 시작한 문자 보급 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의 민중 계몽운동이었다. 방학을 맞아 귀향하는 학생들이 농촌 문맹자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이 운동을 위해 조선일보는 1934년에만 교재 '한글 원본' 100만부를 발행해 무료로 배포했다. 일제의 조선 문화 말살 정책이 극에 달하던 1938년 착수한 향토 문화 조사는 우리 문화의 발굴과 보존을 통해 일제에 대항한 대사업이었다.

    6·25 전쟁 이후 납북자 송환에 나선 1964년 '납북 인사 송환 100만인 서명'은 국제적으로 큰 관심을 끌었다. 8월 말 서명 작업을 마감한 결과 101만1980명이 서명했다. 조선일보 방우영 대표는 유엔본부를 방문해 서명철을 전달했다.

    환경 캠페인에서도 가장 앞섰다. '쓰레기를 줄입시다'(1992년) '샛강을 살립시다'(1994년) 등 잇단 캠페인을 통해 환경 운동에 불을 붙였다. 1992년 제정한 환경대상은 환경 운동 공로자에게 수여하는 국내 최초의 상으로 올해 25회째를 맞고 있다.

    '산업화는 늦었지만 정보화는 앞서가자'는 정보화 운동 선언(1995년)과 어린이·청소년에게 인터넷을 보급하고 교육하는 키드넷 운동(1997년) 등을 통해 21세기 정보화 사회를 선도하고, 거실을 서재로(2007년) 캠페인을 통해 책 읽기 문화를 이끌었다.

    광복 70년을 맞은 2015년 7월 '통일과 나눔' 재단을 설립해 '통일나눔 펀드'를 조성하고 앞으로 다가올 '통일 시대'를 대비하고 있다. '나눔, 통일의 시작입니다'를 구호로 모은 '통일나눔 펀드'에는 지금까지 170만명이 참여해 3137억원의 통일 기금을 마련했다.

    지령3만호. 문인


    문인

    1930년 3월 어느 날 스물아홉 살 조선일보 기자 심훈(1901~1936)은 울적한 마음으로 시(詩)를 적었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면은/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 끊기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에 날으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드리받아 올리오리다/ 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리까.’

    ‘그날’은 광복의 날이다. 당대에는 발표할 수 없는 글이었다. 시는 1949년 세상에 알려졌다. 심훈은 ‘그날’을 보지 못하고 1936년 사망했다.

    심훈은 원래 영화배우 겸 감독이었다. 1926년 이경손 감독 영화 ‘장한몽’에서 여주인공 심순애의 상대역인 이수일 역을 맡았다. 이듬해에는 자신이 시나리오를 쓴 영화 ‘먼동이 틀 때’를 감독했다. 영화는 단성사에서 개봉해 5만명 관객을 모았다. 흥행 성적은 별로였다. 제작비에 크게 못 미쳤다. 영화사는 파산했다. 이후 심훈은 1928년부터 1931년까지 조선일보 영화 담당 기자로 활동한다. 조선일보가 ‘문자 보급 운동’을 활발히 펼칠 때였다. 심훈의 대표작 ‘상록수’는 문자 보급 운동을 소재로 한 농촌 계몽 소설이다. 기자 경험이 바탕이 됐다.

    우리 근대문학에서 빛나는 작가 상당수는 조선일보 기자였다. 당대 의식 있는 엘리트들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민간 신문에 모여들었다. 마땅히 일할 곳을 찾지 못한 때문이기도 했다. 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 같은 일제 착취 기관에 취직할 수는 없었다. 당시 신문사는 이들의 마음속 정부(政府)였다. 정치 활동이 원천 봉쇄된 그들은 기자로서 글을 쓰고 시·소설 등 작품을 지면에 발표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조선일보는 조선의 문단과 동의어(同義語)였다. 이광수 현진건 김동인 염상섭 김동환 노자영 이육사 심훈 김기림 백석 채만식 계용묵 노천명 최정희 이헌구 윤석중…. 근대문학사에 빛나는 수많은 문인이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민중의 애환을 달래고 우리말을 갈고 닦았다. 노수현 안석주 정현웅 김규택은 당대 최고 화가·삽화가이자 조선일보 기자였다.

    홍명희는 소설 ‘임꺽정’을 1928년부터 13년에 걸쳐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1930년대 10년간 그가 쓴 거의 모든 글은 조선일보와 그 자매지 ‘조광’에 발표됐다. 동생 홍성희가 조선일보 판매부장, 장남 홍기문이 조사부장·학예부장·논설위원이었던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홍명희가 쓴 유일한 소설인 ‘임꺽정’은 조선 명종 때 백정 출신 도적이 주인공이다. 다양한 토속적 어휘와 민속 자료에 대한 기록으로 우리말의 보고(寶庫)로 평가되고 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한용운은 5편의 소설을 낸 작가이기도 하다. 미발표·미완성 소설을 제외하면 한용운이 생전에 발표해 완성한 소설은 조선일보에 연재한 ‘흑풍’과 ‘박명’ 두 편뿐이었다. 첫 장편소설 ‘흑풍’은 1935년 4월 9일부터 1936년 2월 1일까지 241회에 걸쳐 연재됐다. 조선일보는 1935년 4월 2일자 ‘흑풍’ 연재 예고에서 “‘님의 침묵’이란 시집으로 이미 시인으로서의 선생을 대하였거니와 금번 이 흑풍으로 다시 소설가로서의 선생을 대하게 됩니다”라면서 “선생의 소설은 다른 소설과 유가 다릅니다. 좀 더 다른 의미로 읽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주문했다. 흑풍은 선풍적 인기를 끌어 신문 발행 부수가 6000부 늘었고 이 소설을 읽기 위해 조선일보를 본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한용운은 1939년 11월 1일부터 1940년 8월 10일 조선일보 폐간 때까지 ‘삼국지’를 번역·연재했다. 조선일보가 폐간됐을 때 그는 ‘신문이 폐간되다’라는 한시를 써 아픔을 토로했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진 서울의 가을/ 한강물도 울음 삼켜 흐느끼며/ 연지(硯池)를 외면한 채 바다로 흐르느니.’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은 ‘조선일보 문인 기자’로 특별히 기록할 만하다. 다른 문인 기자들이 대부분 시인·소설가로 먼저 이름을 알린 뒤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한 것과는 달리 그는 1930년 조선일보 첫 공채 기자로 시작해 ‘문인’으로 나아갔다. 1940년 폐간 때 학예부장(현 문화부장)을 지냈다.

    김기림은 폐간을 앞두고 당시 젊은 시인 서정주에게 전보를 친다. “총독부에서 신문을 폐간하라고 한다. 시 한 편을 써주었으면 한다”는 내용이었다. 서정주는 뒤늦게 전보를 접했다. 그러나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늦었지만 조선일보 폐간시를 써 내려갔다. 제목은 ‘행진곡’이었다.

    ‘잔치는 끝났드라. 마지막 앉어서 국밥들을 마시고/ 빠알간 불 사루고/ 재를 남기고/ 포장을 걷으면 저무는 하늘/ 일어서서 주인에게 인사를 하자/ 결국은 조금씩 취해가지고/ 우리 모두 다 돌아가는 사람들/ 목아지여/ 목아지여/ 목아지여/ 목아지여/ 멀리 서 있는 바닷물에선/ 난타하여 떨어지는 나의 종소리.’

    1994~현재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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