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재·안재홍·한용운·홍명희… 시대를 이끌고

    입력 : 2017.06.24 03:02

    [조선일보 지령 3만호]
    방응모·신석우·조만식… 대쪽같던 신문인

    조선일보가 고난과 격동, 성취가 이어진 한국 근현대사와 호흡을 함께하며 30000호 발간의 위업을 달성하기까지 힘을 합쳐 신문을 만든 많은 사람의 고뇌와 땀이 있었다. 시대의 고비마다 민족의 갈 길을 제시하며 지면을 빛낸 논객들, 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을 읽는 즐거움을 선사했던 문인들, 그리고 늘 넉넉지 않았던 경영을 책임지며 이들이 마음껏 뜻을 펼칠 수 있도록 뒷받침했던 경영자들의 면모를 소개한다.

    논객 기자

    논객

    안재홍

    일제 치하 조선일보를 대표한 논객은 민세 안재홍이었다. 3·1운동에 참가해 3년간 옥고를 치른 뒤 시대일보 논설위원으로 언론계에 투신한 그는 1924년 민족운동가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주필로 초빙됐고 발행인·부사장·사장을 역임했다. 조선일보에 재직하던 8년간 사설 980여 편, 시평 470편 등 무려 1450여 편의 글을 썼다. 이 기간 경영 책임을 맡기도 했고, 1년 이상 옥고를 치렀는데도 한 해 평균 180편이 넘는 글을 쓴 것이다. 그의 글은 짧은 보도 기사가 아니라 장문의 논설이었다. 이는 그가 사상가였을 뿐 아니라 속필(速筆)이었기에 가능했다. 그와 함께 논설을 집필한 이관구는 “민세는 단숨의 필력으로 사설 한 편을 웅장 담대하게 반 시간 안팎으로 써놓았다”고 회고했다.

    문일평

    일제가 동화 정책을 펴면서 민족의 정체성이 흔들리던 1930년대 조선일보는 우리 역사와 전통을 알리는 칼럼과 사설을 게재하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이때 그 중심에 섰던 인물이 사학자 호암 문일평이었다. 그는 1928~1931년 배재·중앙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일보에 글을 썼고 1933년부터는 편집고문으로 상근하며 ‘사외이문(史外異聞)’ ‘화하만필(花下漫筆)’ ‘역사 이야기’ 등을 연재했다. 그가 조선일보에 발표한 방대한 분량의 역사물은 세상을 떠난 후 조선일보사에서 ‘호암전집’으로 간행됐다.

    홍종인

    식민지, 내전, 학생혁명과 쿠데타 등 우리 민족이 경험한 격동의 20세기를 조선일보 기자로서 목격하고 기록한 사람이 홍종인이었다. 1925년 시대일보 기자로 언론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29년 조선일보로 옮겨 1940년 일제가 강제 폐간할 때까지 근무했다. 그리고 광복 후인 1945년 12월 조선일보가 복간되자 편집국장·주필·부사장·회장으로 재직했다. 두 차례에 걸쳐 10년간 주필을 역임한 그의 별명은 ‘홍박(洪博)’이었다. 대학을 다니지 않았지만 엄청난 독서량으로 다방면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퇴임한 뒤에도 편집국에 불쑥 나타나 신문 지면에 대해 까마득한 후배들을 질타하는 정열을 지녔던 ‘평생 현역 기자’였다.

    최석채

    2000년 5월 IPI(국제언론인협회)가 전 세계 언론인 50명을 선정해 ‘언론자유 영웅’ 칭호를 수여했을 때 한국인으로 유일하게 포함된 사람이 조선일보 주필을 지낸 최석채였다. 광복 후 대구에서 언론인으로 활동하다 경찰에 투신했던 그는 1954년 언론계로 복귀했다. 대구매일신문에서 편집국장과 주필로 재직하던 중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로 구속됐다가 무죄판결을 받았다. 1959년 10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1960년 3·15 부정선거 직후 ‘호헌구국 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는 사설로 4·19혁명의 불길을 지폈고, 1964년 언론윤리위법 파동 때는 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으로 반대 투쟁에 앞장섰다.

    선우휘

    ‘욕 많이 먹은 언론인으론 기네스북감’. 조선일보 주필을 역임한 선우휘가 자기 자신을 평한 말이다. 광복 후 월남한 그는 언론인의 비판정신을 견지하면서 반공에 투철해 좌·우 양쪽에서 싫은 소리를 들었다. 1946년 3월 조선일보에 입사한 그는 1948년 군에 들어가 정훈장교로 1957년까지 근무했다. 1955년 단편소설 ‘불꽃’을 발표해 동인문학상을 받은 그는 소설가로도 이름을 날렸다. 1961년 5월 논설위원으로 조선일보에 복귀한 그는 세 차례나 편집국장을 역임하며 회사가 어려울 때마다 ‘구원투수’ 역할을 맡았다. 1973년 8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에서 납치됐을 때 한밤중에 정부를 비판하는 사설로 갈아 끼운 사건은 한국 언론사에 기록된다.

    이규태

    만 23년, 8396일, 6702회. 한국 언론 사상 최장수 연재물로 기록되는 ‘이규태 코너’는 1983년 3월 1일 ‘원고지 6~7장에 동서고금을 오가는 이야기로 시사 문제를 풀어내라’는 방우영 사장의 지시로 시작됐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고서와 신문·잡지가 쌓여 있는 서재에서 필요한 자료를 뽑아서 쉽지만 알맹이 정보가 가득 찬 감칠맛 나는 글을 써내는 솜씨는 한국과 세계 구석구석을 발로 누볐던 그이기에 가능했다. 당시 기자로는 드물게 공대를 나온 그는 1968년 ‘개화백경(開化百景)’을 연재하면서 ‘이규태 한국학’이라고 불린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고 ‘한국인의 의식구조’ ‘한국의 인맥’ 등 후속 연재물로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일가를 이뤘다.

    경영인

    공식적으론 3대이지만 실질적인 조선일보 초대 사장으로 꼽히는 인물은 남궁훈이다. 한말 대표적 민족지였던 황성신문 사장을 역임한 그는 1921년 4월 조선일보를 인수한 송병준이 사장으로 초빙하자 ‘신문 제작과 사원 채용에 간섭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와 소작쟁의 기사를 과감하게 싣는 등 민족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지면을 쇄신해 취임 당시 3000부이던 발행 부수를 1만5000부로 끌어올렸다.

    1924년 9월 남궁훈에게서 조선일보 사장 자리를 넘겨받은 인물은 이상재였다. 민족운동가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면서 ‘민족의 사표(師表)’로 추앙받던 그를 모셨다. 그는 고령으로 매일 출근하지는 않았지만 언론계의 어른 역할을 했다. 1927년 2월 민족협동전선체인 신간회가 만들어졌을 때 회장으로 추대됐다.

    1927년 3월 와병 중인 이상재가 사장에서 물러나자 신석우 부사장이 뒤를 이었다. 경기도 의정부 대지주 집안 출신인 그는 물려받은 재산을 조선일보에 쏟아부었다. 경영·편집진을 대폭 보강하고 조·석간제를 실시하면서 ‘혁신 조선일보’의 기치를 들었고, 사장으로 취임해서는 일제 비판에 더욱 고삐를 당겼다. 그는 재정난이 가중되는 와중에 1931년 5월 회사를 떠났다.

    1932년 5월 말 조선일보가 경영권 분규까지 겹쳐 장기 휴간에 들어가자 경영 정상화 책임을 맡은 조병옥과 주요한은 개신교 민족지도자 조만식을 사장으로 영입했다. 오산학교 교장, 평양YMCA 총무를 역임한 그는 회사를 안정시키는 한편 새로운 사주(社主)를 물색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평안도 동향의 ‘금광왕’ 방응모가 그의 설득을 받아들여 1933년 3월 조선일보를 인수했다. 그해 7월 사장에 취임한 방응모는 웅장한 새 사옥을 짓고 취재용 비행기를 구입하는 등 과감한 투자로 조선일보의 중흥을 이끌었다. 경쟁지의 절반이었던 발행 부수는 3년 만에 거꾸로 두 배 이상 앞서게 됐다.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된 이후 잡지 발행에 주력하던 그는 1945년 8월 광복이 되자 11월 복간호를 냈다. 그는 6·25전쟁이 발발한 직후인 1950년 7월 공산군에 납북됐다.

    선장을 잃은 조선일보를 지탱하는 역할은 방응모의 장손인 방일영에게 맡겨졌다. 27세에 경영 책임을 맡게 된 그는 전시판 제작을 진두지휘하는 등 전력을 기울였다. 1952년 4월 금융인 장기영을 사장으로 영입했고 1954년 5월엔 직접 대표로 취임해 조선일보 발전의 새로운 토대를 닦았다. 1952년 조선일보에 합류해 기자와 경영인으로 활동하던 방우영이 1964년 11월 형의 뒤를 이어 사장으로 취임해 1993년 3월까지 재임하면서 ‘정상(頂上) 조선일보’를 향한 발걸음을 이끌었다.

    1980~1990년대 초 조선일보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