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1만호 신문 소장한 정운혁씨… 당시 아현동서 신문배달

    입력 : 2017.06.24 03:02

    [조선일보 지령 3만호]
    자취하며 학비 벌려 아르바이트
    2000년 부산대 교수 정년 퇴임

    올해 82세인 조선일보 독자 정운혁씨가 조선일보 지령 1만호(1955년 3월 23일)를 들고 있다. 그에겐 스무 살 대학 신입생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보물’이다.
    올해 82세인 조선일보 독자 정운혁씨가 조선일보 지령 1만호(1955년 3월 23일)를 들고 있다. 그에겐 스무 살 대학 신입생 시절의 추억이 고스란히 담긴 ‘보물’이다. /김종호 기자
    "함태영 부통령 구독, ○○○집 부근" "김도연 민의원 집 근방 조씨 구독"….

    조선일보 1만 호(1955년 3월23일)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온 독자 정운혁(82·부산 금정구 구서동)씨는 대학 신입생 때 조선일보 배달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의 낡은 수첩엔 이런 내용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정씨는 "그즈음 서울 아현동, 충정로 일원에 신문을 배달했다"며 "구독자들을 일일이 기억하기 어려워 수첩을 만든 뒤 집주소와 이름, 수금 현황 등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54학번(1954년 입학)'인 그는 당시 서울대 문리대 1학년 재학 중이었다. 충남 공주에서 올라와 아현동에서 자취하며 어렵사리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정씨는 "학비에 보탤까 해 자취집 부근 동네에서 신문 배달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월급은 1500환. 신문 구독료는 월 300환이었다. 그는 "자취집 월세가 1500환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수첩은 갱지로 된 공주시의 천연두 접종 안내문을 반으로 접고 굵은 실로 묶어 손수 만든 것이었다.

    수첩엔 "비가 주룩주룩 내려 (독자를) 깨워가며 배달했다" "수금하러 갔다가 하나도 못 하고 돌아왔다"는 애환과 "25집 확장" "15집 수" 등 순탄한 날의 기억들이 반듯한 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글자는 대부분 한자. 정씨는 "어느 날 새벽 배달을 갔는데 평상에 앉아 신문을 기다리던 중년 남자를 만난 적이 있다"며 "그는 자신을 화가라 하며 무슨 말인가를 많이 했던 기억이 나는데 나중에 돌아보니 이중섭 화백이었던 듯하다"고 말했다.

    '독립촉진에 공헌(김병로 대법원장 축사)''구호양곡 등 2만 가마 변질''연이은 열차사고''처칠 수상직 사임 요청'…. 정씨가 보관 중인 지령 1만 호 조선일보엔 이런 기사들이 실려 있었다. 5면엔 박종화 선생의 소설 '임진왜란'이 연재 중이었고 '바그다드의 도적, 수도극장''의적공주, 단성사' 등 영화 광고가 많았다.

    정씨는 "배달 중 지령 1만 호가 나와서 기념으로 보관해왔다"며 "벌써 3만 호까지 왔다 하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지령 1만 호는 모두 8면. 다 흑백인데, 1면에 실린 축하 꽃 그림만 빨간색을 입었다. 지난 23일자 조선일보는 본지와 섹션 등 모두 72면. 62년여 동안 지면 수가 9배 늘어났다. 조그맣고 흑백 일색인 사진들도 큼직하고 훨씬 다양해지면서 대부분 컬러로 바뀌었다.

    62년의 세월을 보낸 '1만 호' 신문도 달라져 있었다. 발간 당시 흰색이었을 색깔이 누르스름해졌다. 이 신문을 배달한 대학 1학년 꿈 많았을 청년의 팽팽했던 얼굴은 주름졌다. 새까맣던 머리도 은발로 변했다. 정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로 제자를 가르치다 지난 2000년 정년 퇴임했다.

    대학 시절 이후 지금까지 여러 차례 이사를 다녔지만 '1만 호 신문'은 챙겼다. 정씨는 "1만 호 조선일보는 내게 그 파릇파릇한 젊은 날의 기억과 느낌을 또렷이 되살려 주는 묘약이다. 내 손으로 배달한 신문이라 더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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