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471차례 日帝 압수에도…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했던 조선일보

    입력 : 2017.06.22 03:04

    [조선일보 지령 3만호]

    항일 기사·논설 끈질기게 싣다 총독부 명령에 4차 정간까지 겪어
    강제 폐간 이후 광복 석 달 뒤 복간

    조선일보 지령 3만호 로고 이미지

    '압수(押收)'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 있나요? 국어사전에는 '물건 따위를 강제로 빼앗음'이나 '거둬 감'이라고 풀이돼 있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휴대폰을 걷어 가면서 '수업 끝날 때까지 압수야'라고 하는 일이 있을 거예요. 이 경우엔 당연히 다시 돌려주죠. 하지만 예전엔 돌려주지 않는 '압수'가 많았답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는 자기들 마음에 들지 않는 신문 기사를 지면에 싣지 못하도록 '압수'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1920년 3월 5일 창간한 조선일보는 처음부터 항일 기사와 논설을 잇달아 실어 총독부의 눈 밖에 났습니다. 조선일보가 '불온'하다, 즉 일제가 강요하는 체제에 순응하지 않으려 한다고 판단한 총독부는 기사 삭제와 압수라는 방법으로 신문을 탄압했습니다. 창간 이후 20년 동안 조선일보는 모두 471차례나 압수당하는 수난을 겪었습니다.

    처음 압수된 조선일보 기사는 1920년 4월 28일 자에 실린 '어혼약(御婚約) 있었던 민낭자(閔娘子), 지금부터의 각오'였습니다. 왕세자였던 영친왕 이은(李垠)의 세자빈으로 간택됐다가 일본의 정략결혼 정책 때문에 파혼당한 민영돈의 딸을 방문해 근황과 심경을 보도한 것이었죠. 총독부가 좋아했을 리가 없겠죠? 신문의 의견을 쓰는 사설(社說) 중에서는 이해 5월 17일 자의 '감옥과 유치장 제도 개선의 급무'가 첫 번째로 압수당했습니다. 일제의 야만적이고 비윤리적인 형사 정책을 폭로하는 사설이었죠.

    하지만 조선일보는 이런 탄압을 받고서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1920년 6월 1일부터 열흘 동안 연재된 '조선 민중의 민족적 불평' 기획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모욕의 실상을 낱낱이 파헤쳐 고발하고, 일제 통치를 정면으로 비판해 총독부를 경악시켰습니다. '하고(何故·무슨 이유)로 철저하게 죽이려고만' '조선 통치의 대각성(大覺醒)을 촉(促·촉구)함' 같은 기사 제목은 탄압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이 연재가 계속됐던 6월에 8건, 7월에 16건 기사가 압수됐습니다.

    조선일보의 항일 기사가 반복될수록 이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더욱 심해졌어요. 총독부는 아예 신문 발행을 중단시키는 '정간(停刊)' 조치를 내렸습니다. 조선일보는 1920년 8월 27일 자에 실린 '자연(自然)의 화(化)'란 사설 때문에 민간지로서는 첫 번째 정간을 당했습니다. 무슨 내용이었느냐고요? 미국 국회의원 시찰단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시민의 만세 시위가 일어났어요. 그런데 사설은 이 시위가 자연적인 것이었고, 이를 폭력으로 진압한 일본 경찰의 행동은 잘못된 것이었다고 비난했어요.

    1차 정간은 일주일이었지만, 곧 9월 5일 자에 실린 '우열(愚劣·어리석고 못남)한 총독부 당국은 하고(何故)로 우리 일보(日報)를 정간시켰나뇨'라는 사설 때문에 무기 정간 처분을 받았습니다. 이 사설에는 "우리는 철두철미 배일(排日) 신문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폭탄선언까지 들어 있었습니다. 2차 정간은 81일 동안 계속됐어요. 이후에도 1925년 3차 정간(38일), 1928년 4차 정간(133일) 등 기사를 문제 삼은 탄압이 이어졌습니다.

    1924년 7월 3일 자 조선일보 1면 지면이에요. 맨 위에 실린 기사가 통째로 삭제돼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됐어요. 일제가 강제로 지워버린 이 기사는 사설 ‘소위 대동아건설이란 무엇인가’였죠.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하는 명분이었던 아시아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미리 본 총독부가 깜짝 놀라 독자들이 기사를 읽지 못하게 지웠던 것입니다.
    1924년 7월 3일 자 조선일보 1면 지면이에요. 맨 위에 실린 기사가 통째로 삭제돼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게 됐어요. 일제가 강제로 지워버린 이 기사는 사설 ‘소위 대동아건설이란 무엇인가’였죠. 일본이 한국을 강제 병합하는 명분이었던 아시아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미리 본 총독부가 깜짝 놀라 독자들이 기사를 읽지 못하게 지웠던 것입니다.

    최근에는 당시 삭제되고 압수된 기사들 가운데 지면이 확인되지 않았던 144개 면이 새로 발견됐어요. 그중 1924년 7월 3일 자 조선일보 사설은 일본이 주장하는 아시아주의를 이렇게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제국주의를 철저하게 발휘하기 위하여, 침략 정책을 실지에 확장하기 위하여 모든 위권과 강력을 방패로 삼아 가면과 허식으로 약자를 농락하려 한 것에 불과하노라."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민족의 목소리를 대변하던 조선일보는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 한창이던 1940년 8월 강제 폐간을 당하게 됩니다. 폐간호는 8월 11일 자 지령 6923호였어요. 3·1 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자 '님의 침묵'으로 유명한 시인·소설가였던 만해 한용운은 조선일보에 소설 '흑풍'을 연재하는 등 10여 년 동안 글을 발표했습니다. 폐간 무렵에는 '삼국지'를 연재하고 있었지요. 만해는 민족지 폐간 앞에서 울분을 감추지 못하고 '신문이 폐간되다'라는 한시(漢詩)를 썼습니다. '붓이 꺾이어 모든 일이 끝나니(絶筆墨飛白日休)/ 재갈 물린 사람들 뿔뿔이 흩어진 서울의 가을(銜枚人散古城秋)/ 한강물도 울음 삼켜 흐느끼며(漢江之水亦嗚咽)/ 연지(硯池)를 외면한 채 바다로 흐르느니(不入硯池向海流)!' 만해는 광복 한 해 전인 1944년 별세했지만, 조선일보는 광복 석 달 뒤인 1945년 11월 23일 마침내 신문을 다시 발행하는 복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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