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삼대' 염상섭, '청춘예찬' 민태원, '모던보이' 백석…

    입력 : 2017.06.19 03:26

    [조선일보 지령 3만호]
    조선일보 기자이자 문인으로 한국문학 이끈 문단의 큰 별들

    시 '바다와 나비'

    시인 김기림(1908~?)의 시 '바다와 나비' 전문입니다. 최근 대입 수능 시험에도 나왔습니다. 1939년 조선일보 발행 잡지 '여성'에 실렸습니다. 김기림은 우리 문학사에서 모더니즘 문학을 연 시인으로 평가됩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문단에 나온 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나는 일찍이 문단에 나온 적이 없다. 발표하기 시작한 것도 우연히 신문기자였던 까닭에 자기 신문 학예란에 출장 갔던 기행문을 쓴 데서 비롯됐고 별다른 동기는 없었다."('문단불참기')

    김기림은 1930년 4월 민간지 첫 공채 시험을 치르고 입사한 조선일보 기자였습니다. 사회부와 학예부(현 문화부) 기자를 거쳐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강제 폐간될 때 학예부장이었습니다. 김기림은 '문인'에 앞서 '기자'라는 인식이 강했어요. '편집국의 오후 한시 반'이라는 시는 그가 기자였기에 쓸 수 있었던 시입니다.

    '편집국의 오후/한시 반/모-든 손가락이 푸른 원고지에 육박한다/돌격한다//(…)//째륵/째륵/철걱/공장에서는/활자의 비명…/사회부장의 귀는 일흔두 개다/젊은 견습기자의 손끝은/종이 위로 만주의 전쟁을 달린다'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시인·소설가 중 상당수는 조선일보 기자였습니다. 우리 근대문학사에 빛나는 문인들입니다. 이름을 열거해볼까요.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주요한 현진건 김동환 민태원 심훈 이육사 백석 한설야 최정희 노천명 채만식 계용묵 이은상 윤석중…. 이들은 조선일보 기자, 사회부장, 학예부장, 편집국장 같은 직책을 가지고 매일 신문을 만들면서 시와 소설, 수필과 기행문 등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는 작품을 지면에 발표했습니다. 이들을 '문인 기자' 또는 '기자 문인'이라 부를 수 있겠지요.

    이광수, 김동인, 염상섭, 심훈, 백석, 노천명 사진

    소설 '무정'과 '유정'의 작가 이광수는 1933년 부사장·취체역(이사)·편집국장·학예부장·정리부장 등 5개 직책을 맡아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라고 불렸습니다. 최초의 자유시 '불놀이'를 발표한 시인 주요한과 수필 '청춘예찬'을 쓴 민태원은 편집국장을 지냈지요. 소설 '빈처'의 작가 현진건은 제목 잘 뽑기로 유명한 사회부장이었고요. 소설 '삼대'의 작가 염상섭은 학예부장, '상록수'의 작가 심훈은 영화 담당 기자, 시인 백석은 출판부 기자였습니다.

    '꽃미남' 외모로 유명한 백석은 당대에도 '모던 보이'로 인기였어요. 출판부에서 함께 근무했던 시인 노천명이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라고 한 시 '사슴'의 주인공이 백석이라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백석이 낸 시집 제목이 '사슴'이었지요.

    백석은 통영 여인 '난(蘭)'을 사랑했다네요. 시 '통영'에서 애틋한 사랑을 노래했어요. 최근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소개되기도 했지요. '난이라는 이는 명정골에 산다든데/(중략)/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백석의 슬픈 예감대로 '난'은 동료 기자(신현중)와 결혼합니다. 백석은 난이 결혼한 후 바닷가를 거닐며 또 시를 씁니다. "내가 오래 그려오든 처녀가 시집을 간 것과/ 그렇게도 살뜰하든 동무가 나를 버린 일을 생각한다"('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육사가 쓴 1932년 1월 14일자 기사.
    이육사가 쓴 1932년 1월 14일자 기사.

    저항 시인 이육사는 대구지국 기자였어요. 첫 시 '말(馬)'을 조선일보 지면에 발표한 후인 1931년 8월 기자가 되었습니다. 첫 기명 기사는 '대구의 자랑 약령시(藥令市)의 유래'였습니다. 1932년 1월 14일부터 4회 연재됐습니다. 이후에도 조선일보 지면에 시·수필·평론 등을 꾸준히 썼습니다.

    이육사의 동생 둘도 조선일보 기자였습니다. 이육사는 여섯 형제 중 둘째입니다. 넷째 이원조는 학예부 기자였습니다. 1930년대에는 학예부 기자이자 문학 평론가인 이원조가 너무 유명해서 육사는 '이원조의 중형(仲兄)'으로 소개될 정도였어요. 다섯째 이원창은 1940년 8월 폐간 때까지 인천지국 기자로 활동했습니다. '인천 앞바다 도서 순례기'(1940년 6월 9일) 등의 기사를 썼습니다. 그는 폐간호인 1940년 8월 11일자 '지방 특파원 방담' 기사에서 "기자 생활 5년인데 무슨 인연인지 3형제가 본사에 관계한 것은 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나라 없던 시대 '문인 기자'들은 우리말을 갈고 다듬어 우리 민족의 뿌리를 더듬는 우리 문학을 이끌었습니다. '문인 기자'들을 빼고는 한국문학사를 쓸 수 없습니다. 이들의 작품은 한국문학의 정수(精髓)를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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