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바람보다 빨리 눕는

    입력 : 2017.06.19 03:16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 초 감사원의 내부 보고서가 논란을 불렀다. 혁신도시 사업 효과가 뻥튀기됐다는 골자였다. 혁신도시는 노무현 정부의 대표 사업이었다. 야당과 친노 그룹은 "표적 감사"라며 반발했다, 이들이 더 분노한 것은 당시 감사원장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었다. 원장은 노무현 정부가 임명한 사람이었다. '옛 주군(主君)을 칼로 찔렀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 무렵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는 말이 부쩍 오르내렸다. 국정홍보처의 변신이 특히 화제였다. 노무현 정부 때 정권 홍위병 노릇 하던 홍보처가 180도 달라졌다. 노 대통령이 아직 청와대에 있는데도 국정 브리핑 등에서 당선자 일정만 홍보했다. 인수위 업무 보고에서 집중 공격 당하던 홍보처의 한 간부는 그 유명한 코멘트를 날렸다. "우리는 영혼 없는 공무원입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이 말은 원래 독일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했다. 베버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과 전문성을 강조한 것인데 한국에선 자리 보전을 위해 정권 따라 소신 파는 걸 밥 먹듯 하는 공무원을 상징하는 말이 됐다. 문재인 정부의 '변신 1호'는 인천공항공사 사장이었다. 취임 후 첫 외부 일정으로 방문한 문 대통령 앞에 그는 화끈한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비정규직 1만명을 전원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는 로봇을 도입해 인력을 절감하겠다고 큰소리쳤었다.

    ▶엊그제 기획재정부 2차관이 성과연봉제 폐기를 발표했다. 그는 동서발전 사장 시절 성과연봉제 도입에 앞장서 노동계에서 임명 철회 요구를 받을 정도였다. 웃지 못할 풍경들이 공직사회 곳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살수차 예산을 늘리려던 경찰은 집회 현장에 살수차를 보내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서울대병원은 농민 백남기씨 사망 원인을 외인사(外因死)로 바꿨다. 교육부는 국정 역사 교과서와 누리 과정 정책을 뒤집었다.

    ▶세상의 모든 공직자가 영혼 없는 것은 아니다. 워터게이트 사건 때 미국 법무장관은 대통령의 특검 해임 지시를 거부하며 사퇴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반이민 행정명령을 내리자 항명한 예이츠 법무장관 대행 사례도 있다. 정권이 바뀌면 새 정권의 철학에 맞춰야 하는 공무원의 처지를 이해 못 할 바 아니다. 국정기획위원회가 군기 반장으로 나서 '반성문'까지 강요하는 마당이다. 그렇다 해도 오로지 자리를 위해서 어제까지 했던 말과 정책을 같은 입으로 뒤집어야 하는 공무원들 처지가 씁쓸하다. 풀의 생명력을 노래한 김수영의 시 가운데 "바람보다 빨리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는 구절이 떠오른다.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