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선생님] '언론 자유 영웅' 최석채, DJ 납치 해결 촉구 선우휘, 사형선고 받은 송지영…

    입력 : 2017.06.15 03:03

    [조선일보 지령 3만호]
    정권 비판 사설·칼럼으로 권력에 맞서 싸운 논객들

    조선일보 지령 3만호 로고 이미지

    매일 오전 10시 30분 조선일보 논설위원실은 분주합니다. 신문의 논조를 책임지는 주필과 논설위원들이 둥근 탁자에 둘러앉습니다. 그날 발생한 주요 뉴스들을 꼼꼼히 살핀 후 모인 자리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는 무엇인지, 오늘 어떤 주제와 내용으로 사설(社說)을 써야 하는지 함께 의견을 나눕니다. 서로 목소리 높여 격론을 벌이기도 합니다.

    조선일보는 사설과 칼럼이 강한 신문이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조선일보 논객들은 날카롭게 글을 벼려 우리 사회의 환부(患部)를 도려내는 필봉(筆鋒)으로 나라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4·19와 5·16 같은 격동기에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정의의 붓끝이 되었습니다. 부완혁 고정훈 고병익 송지영 천관우 최석채 이열모 선우휘 양호민 송건호 이어령 같은 논객들이 조선일보 울타리에 모였습니다.

    1960년 3월 15일로 돌아가 볼까요. 자유당 정권이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이튿날 열린 회의에서 회장 홍종인, 부사장 성인기, 주필 유봉영은 "사태의 진전을 지켜보자"는 신중론을 폈습니다. 편집국장 송지영, 논설위원 부완혁·최석채·고정훈 등은 "그럴 수 없다"며 맞서 결론을 내지 못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하야 소식을 보도한 조선일보 1960년 4월 26일자 1면.
    이승만 대통령 하야 소식을 보도한 조선일보 1960년 4월 26일자 1면.

    결국 논설위원들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습니다. 3월 17일자에 실린 사설은 최석채 논설위원이 썼습니다. '호헌 구국 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는 제목의 사설입니다. 이 사설은 4·19혁명의 불길을 지핀 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뜻있는 전 국민은 엄숙히 자문자답해 본다. 과연 이것이 선거인가?고. 양심 있는 인간이라면 3·15 선거를 몸소 겪고 이래도 우리나라에 민주주의의 희망을 걸 수 있다고 장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믿는다. 사는 길은 오직 호헌 구국의 대의(大義)를 내걸고 전체 국민과 더불어 투쟁하는 국민운동의 전개 이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을 자각한다.'

    논객 최석채는 정권에서 볼 때 '위험한 인물'이었습니다. 1961년 1월 편집국장이 된 그는 군사정권의 압력으로 곧 물러났습니다. 그는 한동안 익명으로 글을 쓰는 조선일보의 '유령' 논설위원이었습니다. 1965년부터 1971년까지 주필을 지냈습니다. 2000년 국제언론인협회(IPI)는 그에게 '20세기 언론 자유 영웅'이라는 칭호를 주었습니다. 한국 언론인으로는 유일하게 세계 50인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된 것입니다. 그의 정론직필(正論直筆)을 세계 언론이 인정한 것입니다.

    선우휘 주필 사례는 언론계의 '전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1973년 8월 일본에 체류 중이던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벌인 이른바 '김대중 납치 사건'입니다. 국내 언론은 이에 대해 보도할 수 없었습니다. 사건 발생 한 달째인 9월 7일 새벽 선우휘 주필이 편집국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야근자를 불러 모은 뒤 말했습니다. "주필로서 판단에 따라 책임지고 행동하겠다. 누구의 간섭에도 굽히지 않겠다." 그러고는 윤전기를 세우고 새로 쓴 사설을 넣으라고 지시했습니다. '요즘 우리의 심정은 알고 싶은 것이 있는데 알 수가 없고, 말하고 싶은데 말할 수가 없는 상태에서 몹시 우울하고 답답하다. (중략) 그것은 한마디로 김대중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중략) 국민은 당국에 사건의 조속하고 떳떳한 해결을 촉구할 의무가 있다.'

    1974년 여름 밤 사설을 바꾸려고 공무국에 들른 주필 선우휘(가운데). 러닝셔츠 차림이다.
    1974년 여름 밤 사설을 바꾸려고 공무국에 들른 주필 선우휘(가운데). 러닝셔츠 차림이다.

    이튿날 세상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중앙정보부는 직원을 총동원해 신문 회수 작업을 벌였지만 이미 신문은 독자의 손에 들어간 뒤였습니다. 선우휘는 사장 책상에 사직서를 놓고 몸을 피했습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선우휘를 높게 평가했답니다. 박 대통령은 선우휘 주필에게 감사원장을 맡으라고 했습니다. 정부에 들어와 함께 일하자는 권유였습니다. 선우휘 주필은 "들에 핀 꽃이 어여쁘다 하여 집 안에 옮겨 심으면 아름답겠느냐"는 말로 사양합니다. 그는 평생 '무관(無冠)'의 언론인이었습니다.

    권력과 언론은 늘 긴장 관계일 수밖에 없습니다. 송지영 주필은 5·16 직후 혁명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8년 2개월간 옥고를 치렀습니다. 고정훈 논설위원은 4·19 시위 대열에 참여해 직접 취재하고 군중에게 확성기를 통해 속보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일보 논객들은 오늘도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와 나라의 미래를 두고 치열한 논의를 통해 사설과 칼럼을 집필합니다. 오늘 신문을 펼쳐볼까요. 사설과 칼럼에서 우리 시대 논객들의 고뇌와 열정이 느껴지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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