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한 지붕 네 목사… 이민자 위로하는 이민자 가족

    입력 : 2017.06.10 03:01 | 수정 : 2017.06.10 15:30

    [송혜진 기자의 느낌]
    아버지·어머니·아들·며느리까지… 30년 전 한국 떠났던 정대호 목사 가족

    한때 잘나가던 사장님
    가업이었던 섬유공장… 대통령 표창도 받을 정도
    부모님은 불교 신자… 절에 암자까지 바쳐

    어느날 아내가 아팠다
    지독한 천식에 죽을 고비… 그때 처음 기도 드렸었죠
    살려주시면 뭐든 한다고… 그날 이후 미국行 결심

    월세조차 못낸 미국 생활
    사기·배신·객지 생활… 하루 100달러도 못 벌어
    사고뭉치였던 아들도 그걸 보고 정신 차려

    이미지 크게보기
    30여 년 전 미국으로 건너갈 때만 해도 이민은 한국과의 생이별을 의미했다. 국제전화도 쉽지 않고 인터넷도 없었다. 교회는 슬픔을 잊는 유일한 공동체였다. 김치를 나눠 먹고 한국 TV 프로그램을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며 눈물을 닦았다. 그래서일까, 이 네 식구는 각자 신학대학원을 거쳐 모두 목사가 됐다. 모처럼 서울 옥수동 아들 집에 다 같이 모인 아버지 정대호, 며느리 손숙, 어머니 김영숙, 아들 정재륜 목사(왼쪽부터)가 그렇게 또 한 번 손을 맞잡았다. 그 옛날 샌프란시스코의 그 한인교회에서처럼. / 이진한 기자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창세기 12장 1절).'

    1986년 5월, 당시 서른여덟이었던 정대호씨는 김포공항 출국장 입구에 서서 미국 하와이행 티켓을 쥐고 두 아이에게 말했다. "가자. 모든 건 이제 하늘에 맡기는 거다." 열한 살 난 큰아들 재륜은 고개를 저었다. "안 갈 거예요. 가기 싫어." 여덟 살 난 딸 은경은 말없이 이민 가방 고리를 만지작거렸다. 하늘이 무섭도록 맑은 봄날이었다.

    애초 이들은 떠날 이유가 없었다. 정대호씨는 대구 수성동에서 가업으로 물려받은 섬유공장을 운영했다. 한때 수출을 워낙 많이 해 대통령 표창까지 받을 만큼 규모가 큰 직조회사였다. 네 살 적은 아내 김영숙은 성실한 가정주부였다. 대대로 불교를 믿어온 시부모를 착실하게 섬겼고, 시부모가 돈을 내고 직접 지어 해인사 암자로 바쳤다는 대구 가창면의 절 문암사를 부지런히 드나들며 불경을 읽었다. 생이란 그러나 종종 아찔하게 행로를 뒤트는 법이다.

    대호씨와 종교 문제로 다툰 아버지가 공장을 정리하면서 천천히 회사가 어려워졌다. 아내 김영숙은 그 무렵 지독한 천식에 걸렸다. 병원에선 "가망이 없다"고 했다. 대호씨는 이때 난생 처음 하나님께 기도라는 것을 했다. '아내만 살려주신다면 뭐든지 하겠습니다.' 한 달쯤 지났을까. 아내가 거짓말처럼 병석을 털고 일어났다. 다들 기적이라고 했다. 김영숙이 정대호 손을 잡고 말했다. "여보, 이건 아무래도 운명 같아요." 대호씨는 회사를 정리했다. 직원들에게 퇴직금을 나눠주고 손바닥만 한 가게 하나 겨우 얻을 돈만 들고 일어섰다. 전교 1등 하던 딸내미와 키가 웃자란 아들에게 말했다. "가자, 새로운 곳으로." 31년 전 일이다.

    30여 년의 세월. 그 사이 정대호(69)·김영숙(65) 부부는 목사가 됐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밸리의 교회' 담임목사로 22년을 지내다 지난 5월 초 은퇴했다. 아들 재륜(42)씨도 목사가 됐다. 현재 그는 서울 서빙고동 온누리교회에서 한국으로 역이민 온 미국교포 1.5세대들과 새 신자를 상대로 설교한다. 며느리 손숙(42)도 목사다. 남편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 있는 신학대학원을 나와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한 집안에서만 목사가 넷이 된 셈이다.

    지난달 28일 밤 10시 이들 네 가족을 서울 옥수동 정재륜 목사 집에서 만났다. 이날 미국에서 온 유명 목사 존 파이퍼의 설교를 통역하느라 하루종일 짬이 나지 않았던 정재륜 목사와 늦은 밤 겨우 마주했다. 부모인 정대호·김영숙 부부는 손주들을 보러 잠시 한국에 들렀다고 했다. 모두가 소파에 모여 앉자, 정재륜 목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가족의 이야기는 참 남다르죠. 한때는 한국을 떠나야만 했던 우리의 운명을 저주라고 생각한 때도 있었어요. 이제 와서 돌아보면 모두 축복이었지만요." 정 목사의 말에 네 식구의 눈빛이 문득 아득해졌다.

    480달러가 없어 무릎 꿇고 울던 날

    ―왜 저주라고 생각했습니까.

    정재륜 "사기, 배신, 객지 생활…(웃음). 처음엔 다 엉망이었으니까요. 한국에서 사장 소리 듣던 아버지는 미국에서 1달러, 2달러짜리 액세서리를 떼어다 파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하와이에서 잠깐 지내다 샌프란시스코로 가서, 한인이 '장사 잘되는 곳'이라고 소개한 가게를 덜컥 넘겨받았는데 알고 보니 전혀 아니었죠. 하루 100달러 넘게 팔기도 힘들었어요. 그때부터 고생길도 시작됐고요."

    월세조차 제대로 내기 힘든 날들이었다. 1989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이 나면서 경기가 바닥을 쳤다. 장사가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의지할 사람 하나 주위에 없었다. 네 식구는 그럼에도 성실하게 일했다. 액세서리를 팔고, 옷을 팔고, 때론 샌드위치를 팔았다. 아들 재륜은 용돈을 벌기 위해 동네 이웃집 문을 두들겨가며 "잔디를 깎게 해달라"고 했다. 하루는 아버지와 벼룩시장에서 하루종일 오르골도 팔아봤다. 백인들이 다가와 몇 번 만져보기만 해도 쉽게 부서지는 싸구려 오르골이었다. 결국 대부분 팔지도 못하고 쓰레기통에 들어갔다. 정재륜 목사는 "다들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버는 지 이때 알게 됐다"고 했다.

    ―철이 빨리 들었겠군요.

    "그럼요(웃음). 한국에서 전 사고만 치는 아이였어요. 부모님이 학비를 주시면 그걸 받아 친구들에게 다 나눠주고 '야, 대신 다 같이 학교 가지 말자!'라고 꼬시곤 했죠. 재미 삼아 종종 과자나 문구도 훔쳤고요. 그런데 막상 미국에 와서 부모님이 그렇게 하루종일 돈 버느라고 고생한 걸 보면서 정신을 차리게 됐죠. '가뜩이나 다들 힘든데 나까지 고생시키면 안 되겠구나' 하고요."

    며느리 목사인 손숙이 자란 환경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온 가족이 이모 초청으로 샌프란시스코에 갔지만 삶은 쉽지 않았다. 부모님은 허리 펼 겨를도 없이 샌드위치를 팔아가며 세 딸을 키웠다. 돈을 제대로 내지 않고 샌드위치를 집어가는 손님이 하나 있었다. 손숙의 어머니가 그를 불러 세우면서 무심코 그의 팔을 건드렸다. 손님이 오히려 어머니가 "때렸다"며 몰아세웠다. "제가 그때 손님 회사 인사과를 찾아가서 어머니 대신 싸웠어요. 어머니는 영어가 안 되니 항변조차 제대로 못 했고…." 손숙의 눈가에 금세 눈물이 번졌다.

    정씨 가족 형편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액세서리 가게를 하던 어느 날, 가게 월세에 집 월세를 내려면 480달러가 모자랐다. 저녁 장 볼 돈조차 없었다. 어머니 김영숙은 가게에서 두 자식과 남편에게 "하늘에 맡기자"고 했다. 그리고 네 식구는 붉은 카펫이 깔린 가게 바닥에 엎드려 손을 잡고 엉엉 울며 기도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거짓말 같은 장면을 보게 됐다고 했다.

    ―뭐였죠.

    김영숙 "넷이 눈물 콧물 쏟으며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는데, 그 사이 흑인 손님 두 명이 들어온 거예요. 그들이 우리를 보고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화들짝 놀라서 눈물을 닦고 '편하게 쇼핑하시라'고 말했는데, 이 두 사람이 가게를 둘러보더니 딱 480달러어치 액세서리를 샀어요! 그것도 현금으로요. 한 사람이 30~40달러어치 사가지도 않던 때였거든요. 그들이 나가고, 우리는 '말도 안 돼!' 했죠."

    정씨 남매는 그 와중에도 공부에 전념했다. 아들 재륜과 딸 은경은 줄곧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았다. 아들 재륜은 UC버클리에서 세포생물학을 전공했고, 의대 입학 시험인 MCAT(Medical College Admission Test)에서 만점에 가까운 점수를 받았다. 시험성적표를 들고 재륜씨가 어머니에게 한 말은 "어머니, 제 성적을 보셨으니 이젠 저를 믿고 신학교에 보내주세요"였다.

    이미지 크게보기
    1985년 음력 설날에 김영숙·정재륜·정은경·정대호 네 식구가 찍은 사진. 한국에서 입은 마지막 설빔이었다(왼쪽 사진). 아버지 정대호 목사를 서울 서빙고동 온누리교회 예배 시간에 소개하는 아들 정재륜 목사(가운데 사진). 서로를 항상 자랑하는 ‘팔불출 부자’다. 우리말과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정재륜 목사는 종종 통역가로 변신한다. 지난달 28일 미국 존 파이퍼 목사의 설교를 통역했다(오른쪽 사진). / 정재륜 목사 제공
    딸 은경은 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전액장학금을 받고 예일대에 들어갔다. 대학원은 영국 옥스퍼드로 진학해 전액장학금을 받으면서 국제관계학 석사·박사를 차례로 따냈다. 현재 그는 미국 노동부에서 FTA 협상을 하는 공무원이다. 3년 전에는 존스 홉킨스 의대를 나온 대학원 동기와 결혼했다. 전화통화로 만난 은경씨는 “우리는 늘 부족했지만, 그럼에도 중요한 순간엔 놀랍게도 채워지는 가족이었다”고 했다. “매 순간이 그랬어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날, 어머니는 제게 장미꽃 100송이를 선물로 꼭 주고 싶어 하셨지만 돈이 모자랐어요. 그런데 그날 갑자기 동네 마트에서 단 하루 장미꽃 폭탄세일을 했어요(웃음). 12송이에 99센트씩 팔았죠. 전 결국 장미꽃 100송이를 품에 안고 사진을 찍었고요.” 옆에서 듣던 아버지 정대호 목사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간절하면… 가능해지죠.”

    1.5세대를 위한 노래

    정대호·김영숙 부부는 1995년 사업을 접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아들 정재륜도 “의대에 가는 대신 목사가 되겠다”고 했다. 정재륜·손숙 부부는 함께 목사 안수를 받고 뉴저지주로 옮겨 목회를 하다 2010년 한국 온누리교회로 건너왔다. 2011년 작고한 하용조 목사가 이들 부부에게 “한국에서 1.5세대를 위해 일해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다. ‘1.5세대’란 미국 사회학자들이 한국인의 이민사를 관찰하면서 붙인 학술용어로, 10~15세 무렵 부모 손을 잡고 미국 땅으로 건너온 한인 교포를 일컫는 말이다. 이들 부모를 1세대, 이들 자녀를 2세대로 정의한다.

    ―왜 1.5세대죠?

    정재륜 “아무리 똑똑하고 탁월해도 한국 이민자가 미국 사회에 뿌리내리는 건 쉽지 않아요. 군대 문제, 취직 문제 등으로 고민하다가 이들 중 상당수가 한국에 다시 돌아오죠. 나쁘게 말하면 그중 일부는 외국물 좀 먹고 영어 좀 하니 한국 오면 거들먹거리고 살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그런데 한국은 그동안 급속도로 성장했거든요. 순수 국내파들이 이젠 영어도 잘하고 인맥도 유학파보다 나아요. 반면 1.5세대들은 한국말도 잘 못 하고, 한국 문화도 잘 몰라요. 겉만 한국인이지 속은 외국인이죠. 영어 잘하던 사람이 무조건 대접받던 건 이미 20년 전, 홍정욱씨가 ‘7막 7장’ 쓰던 때 끝난 거예요. 결국은 그렇게 부모와도 소통 못 하고 사회에도 적응 못 하면서 계속 겉돌아요. 돌아가신 하용조 목사님은 이들을 제대로 끌어안고 품지 못하면 한국 사회가 언젠가는 곪게 될 거라고 걱정하셨죠.”

    정재륜 목사는 강북과 강남 곳곳을 오가며 외롭게 살아가는 1.5세대들을 찾아다녔다. “교회는 이제 안 나간다”고 손사래 치는 이들을 계속 찾아가 밥 사주고 차 사주며 말을 붙였다. “너 여기 친구 없지? 외롭지? 같이 적응해보자”라고 하면서. 아내 손숙은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쓰는 어린이들을 위한 설교를 맡는 동시에, 이들 1.5세대를 모아 교육시킬 프로그램을 연구했다. 손 목사가 이들 공동체를 위해 붙인 이름이 바로 ‘포인트 파이브(Point5)’다. ‘1.5세대’에서 숫자 1을 뺀 것이다.

    ―그럼 모여서 뭘 하나요.

    손숙 “한국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 조직에 적응하는 법… 이런 걸 가르쳐요. 1.5세대가 한국의 조직문화에서 버티는 게 쉽지가 않거든요. 이들이 LG나 삼성 같은 대기업이나 작은 조직에 들어가서도 ‘모난 돌’ 취급을 받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의견을 전하는 법,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섞이는 법을 배워야 하거든요. 우리 말로 이야기 나누고 토론하고, 요즘 문화가 어떤지를 묻고 듣는 거죠.”

    정재륜 “쉽게 말하면 한국에서 행복하게 안착하도록 도와주는 거죠. 이들은 사실 하소연도 잘 못 해요. ‘힘들다’라고 말하면 ‘뭐야, 너 유학하고 왔잖아? 배부른 소리 한다’는 대답부터 듣거든요. 이들 이야기를 들어주고, 경험을 서로 듣고 나누도록 해주고, 함께 기도하도록 하는 거죠. 그래서 이 모임의 또 다른 이름이 랄라학교(Lala school)’예요. 여기서 랄라는 ‘해외 생활하다 돌아온 당신(Life after living abroad)’의 약자죠.”

    한때 사고도 쳐보고 이런 경험 저런 경험 다 해봤다는 정 목사인 만큼 그가 매주 토요일 진행하는 새 신자 예배를 듣고 부모가 자녀를 끌고 와서 상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정 목사는 “한국 부모가 문제아라고 데려와서 만나보면 정말 사고를 세게 치는 아이는 거의 없더라. 대부분이 아직 부모와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몰라 좌충우돌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 아이들에겐 뭐라고 조언합니까.

    “사고를 칠 거면 제대로 치라고요(웃음). ‘그렇게 잔잔하게 반항한다고 뭐가 바뀌니? 할 거면 제대로 해! 감옥에 갈 정도로 큰일을 쳐! 부모님이 뒷목 잡고 졸도할 정도가 돼야지, 그게 뭐야? 대단한 일(Something)부터 제대로 하고 나랑 다시 만나!’ 이러면 애들 눈빛과 태도가 딱 달라져요. ‘이 목사 진짜 제대로 미쳤구나, 울 부모님에게 반항하는 정도로는 약발 없겠구나?’ 하는 거죠(웃음).”

    10~20명이 겨우 모여 단출하게 시작했던 포인트 파이브는 이제 600명가량이 모이고 있다. 이들은 요즘 모여서 이렇게 외친다고 한다. “케, 쉐, 페!” 돌봄(Care), 나눔(Share), 기도(Prayer)의 영어단어 첫 글자만 딴 말이다.

    “A에 B를 더하면 C가 되리니”

    미국으로 돌아간 정대호·김영숙 부부는 은퇴 이후에도 여전히 교회에서 산다. 요즘 이들은 손주들을 돌봐주려고 미국까지 건너온 한인 노인들을 위해 노래 교실을 열었다고 했다. 김영숙 목사는 “늙으나 젊으나, 여기서나 저기서나 외로운 한인들이 참 많다. 이들의 마음을 보듬어주고 달래주고 싶었다”고 했다.

    ―어떤 노래를 부릅니까.

    김영숙 “’고향’, ‘향수’, ‘엄마 생각’…. 쉽고 누구나 아는 노래죠. 그렇지만 부르다 보면 눈물 나고 추억이 떠오르는 노래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건 이런 작은 힐링일 거예요.”

    정대호 “종종 이런 생각을 해요. 한국 사람은 참 근성 있고 정직하거든요. 이들이 미국에서 이민자로서 힘들게 자라고 버티면서 또 덕분에 미국식 자유주의 교육과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고 컸잖아요. 한국의 A와 미국 문화의 B를 더하면 이도 저도 아닌 짬뽕이 될까? 꼭 그렇진 않은 것 같아요. 저는 이들이 창의력 넘치는(creative) C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이제 C를 만드는데 남은 에너지를 쓰고 싶죠.”

    정재륜 목사와 손숙 목사의 꿈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부부는 “한국인이 지금 전 세계 250개 나라에 퍼져 살고 있는 것을 알고 계세요?”라고 물었다. “중국인, 유대인보다 더 널리 멀리 퍼져 있는 민족이 한국인이에요. 우리 부모님도 ‘디아스포라(흩어진 사람들)’이고, 저를 비롯한 1.5세대들은 그 디아스포라의 첫 열매인 거죠. 이들을 다 품을 수 있다면, 다 같이 소통하고 만나게 해줄 수 있다면, 한국이 달라지지 않을까요. 100평짜리 고급 빌라에 사는 사람과 단칸방에 사는 사람도 한데 모여 밥 먹을 수 있는 조직이 한국에 몇이나 있을까요. 저희 부부는 그래서 이들을 연결하는 일을 하다 가고 싶어요.”

    ―우리 모두 결국 이민자라는 말처럼 들리네요.

    정재륜 목사는 싱긋 웃었다. “그럼요. 카인이 아벨을 죽이고 자기 살던 곳을 떠난 이후부터, 우리 모두는 이민자예요. 죽어서 천국에 안착할 때까지는 이민자인 거죠. 그렇다면 여기 사는 이곳에선 너와 나, 국내파 유학파,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 좌와 우,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나눌 것 없이 다 같이 엉켜 살면 되지 않을까요. 그게 어쩌면 천국 아닐까요. 우리 가족의 이민사는 그 장(場)을 준비하기 위한 여정이었는지도 모르죠.”

    듣고 보니 그랬다. 우리는 모두 한데 살면서도 그렇게 흩어져 있었다. 편 가르지 않고 외면하지 않고 엉켜 살 수 있는데도 말이다. 가족 2대가 이렇게 거실에 모여 무릎을 붙이고 앉은 것처럼.
    이전 기사 다음 기사
    기사 목록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