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의 新줌마병법] 어디, 이런 남자 없습니까

    입력 : 2017.06.06 03:07 | 수정 : 2017.06.06 10:51

    우직한 바위를 닮았던 사내
    술과 사람, 山을 좋아해서 집안 식솔은 늘 가난했으나
    의리와 신의를 목숨처럼 여겨
    소인배들 판치는 세상에 아버지가 그리운 이유입니다

    김윤덕 문화부 차장
    김윤덕 문화부 차장

    함자에 돌 석(石)을 쓰는 나의 아버지는 화가입니다. 돌도 좋아하지만, 외양도 꼭 돌을 닮았습니다. 번드르르한 대리석 아니라 온갖 풍상에 마모된 빗돌입니다. 성정도 딱 그러합니다. 두 쪽으로 깨져도 소리 하지 않는 바위처럼 무심하고 투박합니다.

    눌변의 이 평양 남자가 평생 좋아한 것이 셋 있습니다. 술, 친구, 산(山)입니다. 본업인 그림보다 이 셋을 더 좋아한 바람에 불세출의 화가가 못 되었다고 어머니는 지금도 혀를 차십니다. 일생 남기신 그림이 200점이 못 됩니다. 술 먹고, 친구 만나고, 산을 떠도느라 붓과 씨름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명절날 차례 지내다가도 산 사나이들 문간에 어른대면 "너희끼리 지내라우!" 하고는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언제 오실 거냐?"는 물음은 우리 집에선 금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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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 좋아하는 아버지 덕에 철부지 아들은 즐거웠습니다. 손재주 좋은 아버지가 피란 시절 부산에, 수복 후 정릉에 지은 열 평짜리 판잣집은 예인(藝人)들 사랑방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없는 살림에 막걸리를 외상으로 나르고 안줏거리 대느라 허리가 휘었지만 집 마당은 왁자지껄 웃음이 넘쳤습니다.

    오갈 데 없는 이들은 아예 눌러 살았습니다. 해마다 노벨 문학상에 오르내리는 시인도 그중 하나입니다. 밥상 앞에 맨발로 앉는 통에 어머니 꾸중을 듣던 시인은 우리 집 뒷간에 귀한 '휴지'를 제공하는 것으로 '밥값'을 하였습니다. 책 엮고 난 원고지를 가져와 변소 한구석에 쌓아두면 볼일 보는 동안 원고를 한 장씩 읽다가 볼일이 끝나면 밑을 닦아서 버렸습니다. 그중엔 유명한 '세노야'도 있습니다. 시인의 애인도 기억납니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온 애인은 앞집 살던 배우 김지미보다도 예뻐서 아홉 살 소년의 마음을 흔들어놓았습니다. 물빛 원피스 사이로 비치던 하얀 속살은 어찌나 아찔하던지요.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시인이 꺼이꺼이 울며 찢어 버린 애인의 사진을 주워다 서랍에 감춰두고 보면서, '아~아, 끝끝내 아침이슬 한 방울로 돌아가야 할 내 욕망이여'라는 시인의 노래를 따라 읊었습니다.

    칼럼 관련 일러스트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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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가들만이 아닙니다. 미술 선생으로 잠깐씩 교단에 섰던 아버지는 돈 없어 하숙에서 쫓겨난 학생들도 데려와 어머니를 골병들게 했습니다. 하루는 쌀이 똑 떨어져 팥죽을 쑤었더니 아버지가 역정을 내십니다. 장정들에게 아침부터 죽을 주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물정은 모르고 인정만 넘치는 아버지 탓에 어머니는 매일같이 와이셔츠를 다렸습니다. 허구한 날 자고 가는 나그네가 있고, 그가 아버지 셔츠를 입고 가면 손님이 벗어놓고 간 셔츠를 빨아 다려서 그다음 사람이 입고 가도록 준비해 놓습니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놀고 자시기만 한 건 아닙니다. 원고료와 그림 삯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우니, 드럼통 위에 고물 시계들 얹어놓고 팔아도 보고, 바닷가에 천막 치고 카레라이스 장사도 했습니다. 음식의 반은 가난한 화우(畵友)들이 몰려와 먹어치웠지만 아버지는 그 또한 큰 보람으로 여겼습니다.

    문제는 사람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여자 친구도 많았다는 점입니다. 화실엔 종종 시인의 애인만큼이나 아리따운 여인들이 다리를 꼬고 앉아 있습니다. 모델이라는데, 아버지 스케치북에서 여인의 그림을 본 적은 없습니다. 진정한 고수(高手)는 어머니였습니다. 벼락을 내려도 시원찮을 판에 어머니는 당신 탓을 했습니다. '나 같은 목석이 아니라 소주잔 주고받으며 밤새 그림 얘기, 세상 얘기 나눌 수 있는 여인을 만났더라면 더 위대한 예술가가 되지 않았겠나.' 아버지가 매번 두 손 들고 어머니 품으로 항복하고 돌아온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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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이 두려워질 때 아버지의 산 그림을 봅니다. 빨강, 노랑, 파랑 원색의 물감 덩어리를 한 쾌에 휘휘 부려 넣은 장쾌한 산악은 살아 있는 듯 꿈틀거립니다. 그 속엔 장단봉 산기슭, 보통강 들판에서 뛰놀던 소년의 애틋한 그리움이 절절합니다. 혈혈단신 월남해 풍운의 삶 살면서도 단 한 번 눈물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보따리 메고 산으로 훌쩍 떠난 건 꿈에도 그리운 고향 산천이 당신을 불렀기 때문일까요. 땅 보고 걷는 아들에게 "하늘을 쏘아보며 걸어야 대장부다" 호통치던 평양 아바이. 함묵(緘默)의 술잔 기울이다 느닷없이 '사랑하는 마리아'를 열창하던 로맨티시스트. 거칠되 순정이 넘쳤고, 의리와 신의를 목숨처럼 중히 여긴 아버지가 오늘 유난히 그리운 건 '정치판이고 저잣거리고 씨알 굵은 사내는 찾아볼 수 없다'며 혀를 차는 늙은 어머니의 한탄 때문만은 아닙니다. 세파에 부서질세라 납작 엎드린 채 방황하는 우리네 모습에 한숨이 나오는 까닭입니다.

    ※이 글은 사진작가 박기호가 화가 아버지 박고석을 추억한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박고석이 1982년에 그린 '쌍계사 길', 오른쪽 사진은 이중섭 1주기(1957년)에 모인 시인 고은(당시 승려), 소설가 박경리, 화가 박고석. /현대화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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