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지난 31일 면담했던 딕 더빈 미국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는 "한국이 사드(고고도 미사일 방어 체계)를 원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사드 예산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다"고 문 대통령에게 말한 것으로 1일 알려졌다. '한국이 사드가 필요 없다고 한다면 가져가겠다'는 의미다. 더빈 의원은 미국 상원 세출위원회 국방소위원회 간사를 맡고 있다. 국방 예산을 담당하는 미 의회 인사의 이 같은 발언은 한·미 양국 합의에 따라 반입된 사드 발사대 4기에 대해 청와대가 진상 조사를 지시하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란 해석이다.
더빈 의원은 전날 청와대에서 문 대통령을 40분간 면담한 직후 영문연합뉴스, 월스트리트저널과 인터뷰를 갖고 이같이 말했다. 그는 "'미국은 어려운 예산 상황에 직면해 많은 프로그램을 삭감하고 있다. 한국이 사드를 원하지 않는다면 (사드 배치와 운용에 필요한) 9억2300만달러(약 1조300억원)의 예산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다'고 문 대통령에게 말했다"고 밝혔다. 전날 청와대는 면담 내용을 브리핑하면서 이런 발언은 소개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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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빈 의원은 또 "내가 만약 한국에 산다면 북한이 전쟁을 일으킬 경우 한국에 퍼부을 미사일 수백 발로부터 국민을 지키기 위해 되도록 많은 사드 시스템을 원할 것 같다"며 "왜 (한국에서는) 그런 정서가 논의를 지배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국가 안보와 방어가 (논의를) 지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더빈 의원은 이러한 주장을 문 대통령에게 전했다고 말했다.
더빈 의원은 또 인터뷰에서 "문 대통령은 이 문제를 정치적 과정으로 끌고 가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면서 "문 대통령이 사드에 반대하는 것은 주로 '전임 정부가 한 일이란 사실' 때문인 것 같다"고 했다.
더빈 의원 측에 따르면 전날 면담에서는 양측 간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으며, 대부분 시간이 사드 논의에 집중된 것으로 전해졌다. 이날 면담은 청와대가 사드 발사대 4기에 대해 "국방부가 의도적으로 관련 사실을 보고서에서 누락했다"는 진상 조사 결과를 발표한 뒤 이뤄졌다. 더빈 의원 측은 "청와대의 진상 조사 지시가, 마치 미국이 한국 내부에 사드 반입과 관련된 혼선을 초래한 것처럼 비치는 것이 우려스럽다"는 취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함께 더빈 의원은 인터뷰에서 "이 일(사드 반입)이 어떻게 진전됐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비밀이 없고 사드 시스템의 반입은 텔레비전 방송으로 보도됐다"며 "그러니까 우리가 몰래 들여 놓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더빈 의원은 "한국 정부 내에서 의사소통의 실수가 있었을 수는 있지만, 우리 제안에 대해 한국민들이 오해할 만한 일을 미국이 한 적은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는 또 "(문 대통령이 면담 중에) 새 미사일 시스템이 (한국) 환경법에 맞을지 아닐지에 대한 우려를 표현했다"며 "내가 미군 간부들과 얘기해본 바에 따르면 환경 기준을 대충 피하거나 어떤 특별 대우를 바라는 것이 아니더라고 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도 했다. 문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더 많은 비용 분담을 요구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더빈 의원에게 질의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더빈 의원은 "(한국) 정부 내 일부 인사가 사드가 주로 주한 미군을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주장을 펴는 것이 매우 걱정스럽다"며 "나에게는 주한 미군을 보호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면담 중) 문 대통령에게 여러 번 말했다. 한국민들에게도 그것(주한 미군 보호)은 중요한 일이여야 한다"고 했다. 더빈 의원의 두 형인 윌리엄과 리처드 더빈은 6·25전쟁 당시 미 해군 소속으로 참전했었다. 더빈 의원은 "2만8500명의 주한 미군은 한국민의 안전을 위해 그들의 목숨을 걸고 있으며 그들도 모든 한국민이 그러하듯 (북의 미사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더빈 의원은 "나는 귀국 후 동료 의원들과 (사드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면서 "그러나 사드 배치의 미래에 정말로 불확실성이 있으며 새 대통령은 최종 결정을 하기 전에 정치적 과정을 거치길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더빈 의원은 현재 미국에서 야당인 민주당 소속이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 입장과는 무관하다"는 해석도 나올 수 있다. 하지만 현재 북한 문제에 있어선 민주당과 공화당은 거의 입장 차이가 없을 정도로 호흡을 맞추고 있다. 더빈 의원은 민주당 상원 원내총무라는 점에서도 그가 전하게 될 사드 문제에 대한 이 같은 인식은 미국 조야에 영향을 상당히 미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는 더빈 의원이 문 대통령 면담 후 이 같은 발언을 하자 곤혹스러운 입장이 됐다. 전날 브리핑에선 전하지 않았던 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청와대는 "한국이 사드를 원하지 않는다면 미국은 사드 예산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다는 발언은 회담 속기록에는 들어있지 않다"고 했다. 모든 발언을 속기록에 100% 정확히 기록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발언을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면담에 동석했던 이 관계자는 "'예산을 다른 곳에 쓸 수 있다'는 발언은 어제 못 들었다. 기억을 못 한다. 기억도 없고, (통역사의 통역이 녹취된 대화록에) 그 내용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비슷한 취지의 발언은 '미국 납세자들 세금으로 사드 배치를 위해 9억2300만달러를 지불할 예정인데 한국 내에서 사드 배치가 큰 논란이 되는 것에 대해 놀랍다. 문 대통령에게 묻고 싶다'고 말한 것이 있었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이에 대해 "사드 배치는 한·미 공동으로 내린 결정이고 전 정부의 결정이지만 정권 교체가 이뤄졌다고 해서 가볍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고 답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