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편지] "사랑하는 코레아에 나를…" 6·25 참전 프랑스인의 유언

조선일보
  • 이명래 한국자산관리공사 부산본부 선임전문위원
입력 2017.06.02 03:12

이명래 한국자산관리공사 부산본부 선임전문위원
이명래 한국자산관리공사 부산본부 선임전문위원
장미가 눈부시던 지난해 이 무렵, 어느 프랑스인이 부산에서 묵을 방을 찾고 있었다. 인터넷으로 서신을 주고받던 딸로부터 그 사정을 더 들었다.

프랑스인 레이몽씨는 6·25 참전용사였다. 1950년 여름에 지원해 가을에 왔다. 춥고 배고프고 두려운 전쟁터에서 장병들은 용기를 잃지 않고 복무를 마쳤다. 전사자들은 존경받아 마땅했지만, 살아서 귀국한 병사들은 한국에서 겪은 일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고통에 대해 침묵하면서도 긍지와 감동으로 훈장을 바라보곤 했다.

레이몽씨는 2년 전에 세상을 뜨면서 "유엔공원이 있는 코레아 부산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가족들은 힘들지만 따르기로 했다. 유엔공원은 전사자만 안장하므로 여러 회원국의 동의까지 어렵사리 얻었다. 그렇게 아버지 유해를 안장한 아들 롤랭씨가 1주기를 맞아 85세 노모를 모시고 가족과 온다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도 6·25 참전용사이고, 레이몽씨와 같은 해 돌아가셨다.

우리 부부는 조건 없이 롤랭씨 가족을 맞이했다. 롤랭씨는 유엔공원 추모식에 우리를 초청했다. 1주기 추모식 당일, 행사가 끝나자 인파가 밀물같이 빠져나갔다. 뒤따르던 롤랭씨가 혼자 부친의 묘비를 향해 발길을 돌리는 게 아닌가. 이역만리에 아버지를 두고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지 두 손을 모으고 한동안 고개를 숙였다. 저녁엔 한·불 수교 130년을 기념해 부산항에 프랑스 함대가 입항했는데, 우리는 이 자리에도 초대받았다. 함대에서 본 5월의 부산 바다가 자랑스럽도록 아름다웠다.

이튿날 퇴근길, 아파트 울타리에서 무심코 장미 한 송이를 꺾어 쥐었다. 아들 또래 검은 머리 사내가 들고 온 장미를 받은 백발 여인은 얼굴을 붉혔다. 나는 어머니가 중풍을 앓다 돌아가신 후 상실감과 충격에 직장을 접고 한의학을 배우러 중국에 간 적이 있다. 엄마를 일찍 잃은 그리움은 세월이 흘러도 가시지 않는다. 프랑스 노파의 포옹에서 포근함이 전해왔다.

아내가 다과를 내왔다. 나는 창문 너머로 레이몽씨가 계시는 유엔공원을 가리켰다. 설·한가위·성탄절·생일 등 틈틈이 우리가 대신 찾아뵙겠다고 하자 앙상한 노모의 푸른 눈이 젖고 있었다. 나는 "한국의 아들 역할을 하겠노라"고 했고, 그녀는 나를 온 팔로 감싸 안았다. 아내가 남자 두루마기를 내왔다. 나에게는 좀 크던 차였다. 롤랭씨에게 딱 맞았다. 이튿날 아내는 바지·저고리를 마저 구해왔다. 우리는 또 하나의 어머니와 가족을 두게 되었다.

4박 부산 일정을 끝내고 서울로 가던 날, 그들은 유엔공원에 다시 들렀다. 아들·딸과 손자들이 꽃집에서 산 장미를 묘비 위에 놓았다. 마지막에 할머니가 놓은 것은 잎사귀가 몇 장 붙은, 며칠 전에 내가 드린 장미였다. 얼마 뒤, 롤랭씨 가족이 귀국 길에 집에서 가져온 6·25 사진을 전쟁기념관에 기증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는 한복 차림으로 경복궁과 서울 시내를 누벼 찬사를 받았다고 했다. 파리의 어머니는 때때로 편지를 보내왔다. 17세 때 세 살 위인 공수부대원 남편을 만나 65년간 아름답게 살아왔다고 했다. "남편이 너무 보고 싶다. 영원히 그를 사랑한다"는 편지를 아내가 묘비 위에 올려놓았다.

올해 초 우리 부부는 런던에서 유학 중인 딸을 볼 겸 영국에 갔다. 소식을 들은 롤랭씨가 파리에 들르기를 청했다. 3월의 어느 저녁, 센 강변 레스토랑에서 파리의 어머니는 내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리가 투어를 마치고 공항으로 가던 날은 "부산 식구들을 한 번 더 보고 싶다"며 달려오셨다. 비행기 안에서 헤어질 때 받은 편지를 꺼냈다. 한국어로 번역까지 한 글을 몇 번이나 읽었다. "레이몽에게는 프랑스와 코레아, 조국이 두 개다. 이제 그토록 사랑했던 한국 땅에서 행복하게 안식하고 있다."

다시 6월, 레이몽씨의 부산 안장 2주기다. 아내와 나는 노부부의 빛바랜 흑백 결혼사진과 장미를 들고 유엔묘지로 간다. 지금쯤 파리의 하늘 아래에도 이곳만큼 장미가 가슴 아리도록 아름답게 피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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