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중의 생로병사] 갑자기 착해진 독불장군 아버지, 알고 보니 초기 치매

    입력 : 2017.05.30 03:12

    괄괄한 가부장이었던 70대 K씨
    어느 날부터 아내 곁에 찰싹 붙어 일상 함께하며 '아내 바라기' 돼
    알고 보니 초기 치매로 얌전해져
    짧은 기간 성격·행동 확 바뀌면 뇌질환 징후 아닌지 의심해봐야

    김철중 의학전문기자·전문의
    김철중 의학전문기자·전문의
    K씨는 전형적인 한국 가부장이다. 공기업을 다니다 정년 퇴임한 70대 초반의 이 남성은 한 번도 아내와 손잡고 걸은 적이 없다. 나란히 다니지도 않는다. 성격 급한 탓에 항상 앞서서 걸어나갔다. 두 딸에게도 엄격했다. 결혼한 자식에게는 좀 관대할 만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손자 교육에도 목청 높여 예절을 먼저 따지던 훈장이었다. 체력 떨어지고 직함 떼는 60대에 들어서면 다들 기세가 꺾이거늘, 그의 괄괄함은 식을 줄 몰랐다.

    그러던 그가 야들야들해졌다. 혼자 알아서 결정할 외식 메뉴도 아내에게 여러 차례 물어본다. 부부동반이라면 질색하던 양반이 웬만한 곳에 아내를 데리고 다닌다. 길거리에서도 지하철에서도 항상 붙어 다닌다. 식구보다 친구였던 그가 뭐든 아내와 상의해서 결정하려 한다. 아내는 딸들에게 "너희 아빠와 결혼해서 가장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좋아했다.

    알콩달콩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K씨의 기억력은 점점 쇠약해졌다. TV를 보다가 누구나 알 만한 사람 이름을 물어본다. 며칠 전에 친구 만난 사실을 잊고 약속을 잡으려 한다. 부모 제삿날에 외출해서는 밤늦게 초췌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상하게 여긴 아내와 딸들이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게 했다. 그 결과, 초기 치매 단계라는 판정이 나왔다. 뇌혈관 동맥경화로 인한 미세한 뇌경색과 인지장애가 겹쳤다.

    K씨도 속으로 짐작했다. 최근 들어 기억력이 떨어져 불편했고, 뻔한 것이 가물가물해지니 불안했다. 완벽하고 완고한 성격에 실수하고 망신당할까 봐 초조했다. 그러기에 점점 아내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조언자로서, 안내자로서 아내를 항상 찾았다. 옛날얘기를 나누며 대화가 늘었고, 편안함을 느꼈다. 그는 현재 인지장애와 뇌혈류 개선 치료를 받고 있다.

    [김철중의 생로병사] 갑자기 착해진 독불장군 아버지, 알고 보니 초기 치매
    /이철원 기자
    경도(輕度) 인지장애와 초기 치매 단계에서는 자신의 기억력이 감소했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한다. 그 단계를 넘어서면 기억력이 떨어졌다는 사실도 모르게 되지만, 초기에는 자신의 기억 실수를 인정하고, 기억 감퇴에 불안을 느끼고 위축된다. 치매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더 고집스러워지고, 더 권위적으로 변하고, 때론 난폭해지는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되레 얌전해지고 소심해지는 사람도 있다. '착해진 K'는 알고 보니 초기 치매를 겪는 과정이었다. 부부애를 높인 '금실 치매'였던 셈이다.

    이처럼 어떤 사람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성격이나 행동에 눈에 띄는 변화가 왔다면, 우선 그게 뇌질환 징후에서 기인한 것은 아닌지 의심해봐야 한다. 관심을 갖고 자세히 살피면, 그 안에 단서가 보인다. 걸음걸이가 느려진다든지, 자동차에 오르고 내리는 시간이 길어졌다든지, 젓가락질이 서툴러졌다든지, 잠이 늘었다든지, 깔끔한 사람이 음식을 흘려서 지저분해졌다면 의심해 볼 수 있다. 술자리에서 술잔을 처음 엎질렀을 때는 실수지만 두 번째부터는 술에 취한 결과다. 가벼운 것이라도 징조가 반복적이다 싶으면 이상하게 봐야 한다. 대체로 중년 이후, 사람의 성격은 잘 안 변한다. 바뀔 성격이었으면 진즉 바뀌었다. '사람이 변하면 죽는다'는 말이 왜 있겠나.

    질병으로 인한 증상이 성격과 태도의 변화를 일으켜 오해를 부를 수도 있다. 녹내장으로 주변 시야가 줄어들었거나 백내장으로 시야가 흐려진 사람은 길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봐도 모르고 지나칠 수 있다. 마침 새로 높은 자리에 갔다면 거만해졌다는 소리를 듣기 십상이다. 다리를 꼬아야 허리 근육통이 풀리는 사람은 웃어른 모신 자리에서 무심코 다리를 꼬다가 건방져졌다는 뒷말을 낳는다. 청력이 떨어지면 목소리가 커져서 괜스레 툭하면 사람을 야단치는 '꼰대'란 오해를 산다.

    한 대학병원에 평소 점잖기로 이름난 외과 교수가 있었다. 그런 그가 점점 난폭해져서 주변에서 의아해했다. 수술실에서 하도 닦달하는 바람에 수술 보조 전공의들이 벌벌 떨었다. 뇌 MRI를 찍어보니 머리에서 뇌종양이 발견됐다. 신경 호르몬 분비 이상으로 성품이 성깔로 변한 것이다. 다들 오해를 풀었고, 뇌수술이 잘되길 바랐다. 그런데 뇌 어딘가를 잘못 건드렸는지, 종양은 잘 제거됐는데 수술 후 더 포악해졌다고 한다. 세상일은 성격대로 되지 않는 것도 있는가 보다.

    앞선 K씨가 대학병원 신경과를 다닌 지 6개월, 딸들이 아버지 치매 진료 의사를 찾아왔다. 도대체 어떤 치료를 했기에 아버지가 다시 괄괄해지고 제멋대로 됐느냐고 따지러 온 것이다. 의사는 흐뭇한 표정으로 답했다. "치료가 잘돼서 기억력이 좋아진 거죠. 자신감이 다시 생긴 거예요." 때로는 가벼운 상태의 질병이 좋을 때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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