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박정희 '英雄' 만든 김재규… '10·26' 없었으면 朴의 말년 추했을 것"

    입력 : 2017.05.29 03:03

    ['중정부장 김재규 死刑 37년'… 당시 변호인 안동일씨]

    "대법판사 14명 중 6명 반대… 언론 통제 시절 보도 안돼
    판결 나흘 만에 死刑 집행… '반대' 판사들 모두 옷 벗어"

    "박정희와 민주주의 회복은 아주 숙명적인 관계다, 한쪽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
    野獸 심정으로 維新 심장 쏴"

    중앙정보부장(中央情報部長) 김재규는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安家)에서 박정희를 시해했고, 이듬해 5월 24일 사형됐던 인물이다. 일부 언론에 '김재규 사형 37주기'가 짤막하게 보도됐다.

    그날 안동일(77)씨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김재규 묘소에 참배했다고 한다. 그는 '김재규 변호인'이었다. 한때의 짧은 인연인데 그는 지금까지 김재규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있다.

    안동일 변호사는“김재규는 160㎝ 남짓했고 당시 간경화로 얼굴색이 새카맸다”고 말했다.
    안동일 변호사는“김재규는 160㎝ 남짓했고 당시 간경화로 얼굴색이 새카맸다”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어떻게 해서 인연이 됐나?

    "군법무관을 하고 나와 변호사를 시작한 지 2년째였다. 군법회의에서 김재규, 이기주, 유성옥 등 '10·26 사건' 피의자 3명의 국선 변호인으로 지명됐다고 통보해왔다."

    ―당시 '인권변호사'로 분류된 당신이 왜 지명됐나?

    "미스터리인데, 아마 내가 1회 군법무관의 회장을 맡은 경력 때문인지 모르겠다."

    ―김재규는 중앙정보부 부장으로 정치공작과 반대세력 탄압을 해온 유신독재의 2인자였는데?

    "그에 대해 '대역죄인' '주군을 살해한 패륜아' '은혜를 원수로 갚은 개만도 못한 인간' 등의 평가도 따랐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람을 어떻게 변호할 수 있나 싶었다. 하지만 역사적 재판에 참여하게 됐다는 흥분은 있었다. 박 대통령이 그의 심복인 중정부장에게 총을 맞은 것은 로마시대 시저와 브루투스 사건에나 비교되는 것이었다."

    ―첫 공판은 1979년 12월 4일 열렸는데?

    "10·26 사건이 발생한 지 39일째 되는 날이었다. 육본 법무관실의 대법정에서 열렸다. 법정에 가니까, 이미 김재규 가족 측에서 선임한 20명의 사선(私選) 변호인단이 있었다. 모두 쟁쟁한 재야 변호사들이었다. 자연히 국선변호인은 철회됐다. 하지만 나는 유성옥과 이기주의 국선변호인이기도 했기에 법정에 남았다."

    ―재야 변호사들이 '유신독재의 2인자'인 김재규 구명을 위해 나선 이유는 뭔가? 다른 정치적 목적이 있었나?

    "시해 동기를 알아보자는 취지도 있었고, 정치적 이유도 있었을 거다."

    ―12월 11일 4차 공판에서 김재규가 갑자기 사선 변호인단을 거부했는데?

    "김재규는 법정에서 '저는 소신을 갖고 민주 회복 국민혁명을 기도했다. 오늘의 이 사실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변호인단 조력을 받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내 소신이 퇴색될 가능성이 있다. 원형(原形) 그대로 재판을 받겠다'고 했다. 변호인단의 정치 선전장으로 재판이 흘러가는 데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봐도 그런 면이 있었다. 그날 사선 변호인단은 퇴장하고, 국선인 내가 변호를 맡게 됐다. 그날 밤 9시쯤 재판부와 군검찰의 허락을 받고 남한산성(육군교도소의 속칭)을 찾아가 김재규를 처음 접견했다."

    ―김재규의 첫인상은?

    "흰색 한복에 고무신을 신고 가죽 수갑을 착용하고 있었다. 160㎝ 남짓한 작은 체구였으나 당당했다. 간경화로 얼굴색은 새카맸다. 수사 과정에서 전기고문을 받아 피하지방이 벌겠고, 오른쪽 귀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는 겸손하고 정중했다. 그는 굵은 단주를 굴리며 말했는데, 대화를 나눌수록 진정성이 느껴졌다."

    ―특히 기억나는 말이 있나?

    "헤어질 때 그가 내 손을 잡으며 '부하들은 아무런 죄가 없다. 내 명령에 복종한 죄밖에 없다. 과거 일본에서도 부하들에게는 죄를 묻지 않은 관례가 있었다. 나보다는 그들을 위해 열심히 변론해달라'고 했다(10·26에 연루된 김재규 부하 다섯 명은 모두 사형됨)."

    ―변호인을 맡고 난 다음 날에 12·12 사건(합수부에서 정승화 육참총장을 체포하면서 벌어진 군부 내 유혈 충돌)이 터졌는데?

    "12월 12일은 재판이 진행됐다. 그날 밤에도 육군교도소로 가서 김재규를 접견했다. 12·12 사건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 13일 아침 육본 후문의 초소에 들어서는데 시멘트 바닥에 검은 피가 낭자했다. 완전 무장한 공수부대원들이 못 들어가게 했다. 이날만 재판이 안 열렸고, 매일 속개돼 공판 시작 보름 만에 사형선고가 떨어졌다."

    ―김재규는 왜 박정희를 시해했다고 보나?

    "유신(維新)의 심장인 박정희를 제거하면 전 국민이 자신을 '혁명가'로 추앙하고 미국도 지지할 거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리석다고 해야 하나, 그는 착각했던 거다."

    ―당시 합수부(合搜部)는 '김재규는 중정부장으로서 자신의 정국 수습책이 거듭 실패해 그 무능함이 노출돼 박 대통령으로부터 질책을 당하고 인책 해임설이 나돌아 불안을 느끼는 한편, 군 후배이자 연하인 경호실장 차지철의 오만방자한 태도와 월권적 업무 간섭에도 박 대통령은 차지철만을 편애하는 데 불만을 품고, 대통령 등을 살해한 후 정권을 잡을 것을 기도했다'고 발표했다. '욱'하는 성격에 우발적으로 이뤄졌다는 게 통설인데?

    "차지철이 자극한 측면은 있다. 하지만 우발적인 범행이 아니라 오래 품어온 박정희 제거 계획을 실행했다고 본다. 뒷받침할 만한 물적 정황적 증거가 있었다. 1979년 봄부터 썼던 '자유민주주의' '위대의(爲大義)' '민주민권자유평등' 같은 휘호 6점도 그중 하나다. 그날 밤 결행하기 전 김재규는 만찬장에서 잠깐 나와 박선호(의전과장)와 박흥주(수행비서)에게 준비시키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위하여'라고 말했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조선일보 DB
    ―김재규는 범행 다음 날 합수부에 체포돼 조사받을 때는 '박정희 시해 후 집권(執權)'이라는 진술을 했다. 그 뒤 공판에서는 개인 야욕이 아닌 '민주회복' '국민혁명'으로 바뀌었는데?

    "고문에 의해 몇 대목은 차이가 있었지만 전체 맥락은 같았다. 그는 '10·26'의 목적을 자유민주주의 회복, 보다 많은 국민의 희생을 막는 것, 독재체제하에서 확산되는 자생 좌익세력에 의한 적화(赤化) 방지, 미국과의 관계 회복, 국제사회에서 독재국가 이미지를 씻는 것이라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재야 변호사들이 그를 '민주 투사'처럼 운운하니까, 이에 적응해 대의명분을 만들지 않았을까?

    "재야 변호인들에게 교육받은 결과라는 그런 말을 들었다. 솔직히 나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변호인들이 처음 그를 접견했을 때의 녹음 자료가 다 보관돼 있다. 그때도 김재규의 입에서 '혁명' '민주회복' '자유민주주의' 같은 말이 나오고 있다."

    ―재판장은 '국내외적으로 국가 위기 상황에서 국가원수를 시해한 것은 명백한 대역(大逆) 행위로,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며 사형 선고를 내렸는데?

    "김재규는 '박정희와 자유민주주의 회복은 아주 숙명적인 관계다.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서는 한쪽을 희생할 수밖에 없다.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설 때 물러설 줄 알았지만 박 대통령의 성격은 절대로 물러설 줄 모른다. 국민과 정부 사이에 반드시 큰 공방전이 벌어지고 수많은 사람이 상할 것이다. 그래서 야수(野獸)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고 했다."

    ―1심 사형 판결이 난 뒤 김재규는 어떠했나?

    "그는 살 생각을 안 했다. 그냥 놔둬도 간경화로 얼마 못 살았을 것이다. 내가 접견하면 불교의 깨달음 경지에 관한 얘기를 많이 했다. 항소심에서는 무료 사선 변호인단 7명으로 꾸렸다."

    1980년 1월 22일 시작된 항소심 공판은 세 차례 열렸고 1월 28일 끝났다. 김재규의 최후 육성 진술은 유튜브를 통해 들을 수 있다. 변호인단은 상고했고, 대법원 판결은 5월 20일에 있었다. 김재규와 부하 다섯 명이 '내란목적살인' '내란수괴미수' '내란중요임무종사미수' 등의 혐의로 최종 사형선고를 받았다.

    "대법원 판사 14명 중 6명은 반대의견을 냈다. 내란죄가 성립되지 않고 '단순 살인'이라고 했다. 언론 통제가 되던 시절이라 반대 의견은 보도가 안 됐다. 대법원 판사 중 한 명은 보안사에 끌려가 사흘간 곤욕을 치렀고, 이들 모두 그해 8월과 이듬해 옷을 벗었다."

    ―김재규 변호인들은 무사했나?

    "대법원 선고가 내려진 직후 보안사에 근무하던 군법무관 후배가 다급하게 쫓아와 '몸을 피해야 한다'고 전했다. 우리는 즉시 몸을 피했지만 사무실에 잠깐 들렀던 강신옥 변호사는 붙잡혀 20일간 곤욕을 치렀다."

    ―대법원 판결 나흘 만에 사형이 집행됐는데?

    "나는 도망가면서 사무실에 전화해 재심 청구를 접수시켰다. 통상 재심 여부를 결정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안 한다. 하지만 재심 청구와 상관없이 나흘 만에 집행됐다."

    ―김재규를 어떻게 보나?

    "재야 세력 안에도 유신체제 2인자인 김재규의 행위를 높이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이들이 있었다. '부마항쟁'이 확대돼 국민의 손에 의해 박정희가 쫓겨나게 해야 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재규의 역할은 분명히 있었다. 10·26 사건이 우리 사회의 큰 물꼬를 터준 게 사실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박정희 향수(鄕愁)'가 강해 김재규를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그런 정서를 바꾸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다만 그가 어떤 동기와 명분으로 했는지 제대로 알려졌으면 한다. 나는 김재규가 박정희를 '영웅'으로 만들어줬다고 본다. 만약 10·26이 없었다면 박정희의 말년은 정말 추하게 끝났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를 가장 많이 취재했고 '박정희 신봉자'라는 말을 듣는 언론인 조갑제씨도 "김재규는 박정희의 시의적절한 죽음에 기여했다. 만약 김재규의 결행이 없었다면 박정희는 지금과 같은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이다. 저승에서 박정희가 김재규를 만났다면 '고맙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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