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아시아 트렌드에서 항상 최초이자 최고(first and best)죠."
세바스티안 라젤(54) 덴비 CEO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도자기 식기를 만드는 덴비는 200년 역사를 지닌 영국 1위 테이블웨어 브랜드다. 한국에선 몇 년 전부터 그릇 마니아 사이에 입소문 나기 시작해 작년 봄 한국 지사까지 세웠다. 덴비가 해외 지사를 연 것은 미국에 이어 한국이 두 번째다. 그만큼 한국 시장을 각별히 챙긴다.
연간 600만개 제품을 생산하는 덴비에서 한국은 영국 다음가는 매출을 올리는 주요 시장이다. 영국이 전체 매출의 45~50%, 한국이 30%쯤 차지한다.
"한국에 너무 자주 오다 보니 몇 번째 방문인지 기억도 나지 않네요. 최근 2년 동안 10번쯤 온 것 같아요." 최근 방한한 라젤이 웃으며 말했다.
한국에 오면 가정집을 방문해 찬장까지 일일이 열어본단다. 그만큼 한국 시장을 속속들이 잘 안다. 게다가 덴비로 오기 전 25년간 글로벌 생활용품 기업 유니레버에서 근무하면서, 뷰티 산업에서 아시아 트렌드를 이끄는 중심 국가로서 한국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고 했다.
한국에서 덴비가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건 5년 전쯤부터였다. "젊은 한국 여성들이 '테이블 정체성'을 찾기 시작한 때와 운 좋게 맞물린 것 같아요. 그들 어머니 세대는 화려한 꽃무늬 그릇을 선호했지만, 딸 세대는 꽃무늬가 싫증 났던 거죠. 음식 색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음식을 돋보이게 하는 디자인을 원했어요. 지나치게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덴비 가격대도 젊은 세대 수요와 잘 맞아떨어졌죠."
가정집 찬장까지 열어보며 파악한 한국 소비자 특징은 뭘까. "영국에선 큰 접시 하나에 여러 음식을 조금씩 담아 먹지만, 한국은 반찬마다 따로 그릇에 담아요. 그릇끼리 이루는 조화를 더 중요시하는 것 같아요. 그릇을 차곡차곡 포갠 상태로 보관하는 것도 신기하더군요. 소셜미디어가 폭발적으로 성장해 마치 예술처럼 테이블을 섬세하게 꾸미는 경향도 강하고요."
라젤은 "그릇을 사용하는 관습이 다를 뿐 테이블웨어 트렌드는 전 세계적으로 비슷하다"고 했다. 우선 격식에서 벗어나는 추세다. "깔끔하면서도 여유가 느껴지는 패션이 유행하듯 가족·친구들과 부담 없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 어울리는 그릇이 인기예요. 음식의 국제화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죠. 평범한 가정집 식탁에도 다양한 국적 요리가 올라오니까요. 소비자들이 제품의 연원과 역사에 관심 가지면서 장인 정신이 더욱 중시되고 있어요."
영국에서 덴비가 1위에 등극한 건 1960년대 이전부터라고 한다. 조리 기구와 식기의 조화를 추구하는 트렌드가 영향을 끼쳤다. 1980년대 진한 파란색 '임페리얼 블루' 라인이 크게 인기를 끌면서 파란색이 덴비의 상징처럼 됐다. 한국에선 은은한 색감의 '헤리티지' 라인이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다.
인기 비결에 대해 라젤은 품질을 먼저 내세웠다. "영국 더비셔 지방 점토는 철분 함유량이 많아 견고해요. 오븐, 전자레인지, 냉동실, 식기세척기에서도 깨지거나 가루가 묻어날 염려가 적어요." 그는 "내구성이 뛰어나면서도 둔탁하지 않고 경쾌하고 여성스러운 느낌이 나는 건 깊고 풍부한 색감 덕분"이라며 "디자이너 12명이 팀을 이뤄 컬러와 재료, 유액을 일정 비율로 섞는 '레시피'를 연구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에 와서 김치 수십여 종을 먹어봤다는 라젤에게 김치는 어떤 그릇과 가장 잘 어울릴지 물어봤다. "납작한 접시보다는 작고 오목한 그릇이 적합하겠죠. 하지만 우리는 융통성을 추구합니다. 한국 사람이 김치 담는 그릇에 인도 사람이 소스를 담아도 되고, 한국 사람 밥그릇에 영국 사람이 아이스크림을 담아 먹어도 좋아요. 안 될 게 뭐 있나요(Why n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