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진당 해산 반대하며… 결정문 347쪽 중 180쪽 걸쳐 소수의견

    입력 : 2017.05.20 03:01

    [헌재소장 후보자에 김이수 재판관… '진보적 의견' 많이 내]

    박 前대통령 탄핵심판 결정 땐 "세월호 7시간 불성실" 보충의견
    대학시절 민청학련 사건 연루돼 64일간 구금됐다가 석방되기도
    軍법무관 땐 光州서 5·18 겪어 "대검에 찔린 시신들 직접 봤다"

    19일 문재인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장 후보자로 지명한 김이수(64) 헌법재판관은 2012년 9월 당시 야당이던 민주통합당 추천을 받았다. 헌법재판관으로 일한 4년 8개월간 소수 의견을 많이 냈다.

    대표적 사건이 2014년 말 통합진보당 정당 해산 심판 사건에서 재판관 9명 가운데 유일하게 해산에 반대하는 의견을 낸 일이다. 헌재가 내놓은 결정문 347쪽 가운데 김 후보자가 쓴 반대 의견(소수 의견)이 180쪽이었다. 통진당을 해산해야 한다는 입장에 선 재판관 8명이 낸 다수 의견보다 더 긴 '해산 반대' 이유를 제시한 것이다.

    김 후보자는 반대 의견에서 "이석기 전 의원 등의 발언이 (헌법상) 민주적 기본 질서에 위배되지만, 통진당 전체가 이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통진당은 당비를 납부하는 진성 당원 수만 3만여 명에 이르는데, 구성원 중 극히 일부의 지향을 당 전체의 정치적 지향으로 간주해선 안 된다"고 했다.

    19일 헌법재판소장 후보로 지명된 김이수 재판관이 퇴근을 위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를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19일 헌법재판소장 후보로 지명된 김이수 재판관이 퇴근을 위해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를 나서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이태경 기자

    그는 법원이 전교조를 법외(法外) 노조로 본 근거인 교원노조법 2조에 대한 위헌 심판 사건에서도 재판관 가운데 유일하게 '위헌(違憲)'이라는 입장을 개진했다. 그는 '해직 교사는 교원노조의 조합원 자격이 없다'고 정한 이 법 조항에 대해 "정치 활동을 할 수 없고 다른 직종으로 전환하기도 쉽지 않은 교사 직종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며 "현 조항은 전교조의 단결권을 지나치게 제한하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했다.

    김 후보자는 지난 3월 10일 헌재가 재판관 8명 전원 일치로 '대통령 파면' 결정을 내린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사건에서는 박 전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 행적과 관련한 보충 의견을 냈다. 그는 "대통령은 유례를 찾기 어려운 대형 재난이 발생했는데도 심각성을 아주 뒤늦게 알았고, 안 뒤에도 무성의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썼다.

    2015년 2월 헌재가 '간통죄 위헌' 결정을 내릴 때는 위헌 다수 의견(7명) 쪽에 서면서 "사실상 혼인이 파탄 난 상태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난 경우까지 일률적으로 처벌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했다. 또 지난해 자발적으로 성매매를 한 사람도 처벌토록 규정한 성매매특별법 조항의 위헌 심판에선 "생존 문제 때문에 성매매를 하는 여성까지 처벌하는 것은 과도한 형벌권 행사"라며 '일부 위헌' 의견을 냈다.

    김이수 신임 헌법재판소장 후보자 주요 결정 정리 표

    그는 판사 출신이다. 1977년 사법시험 19회에 합격해 1982년 대전지법 판사를 시작으로 청주·인천·서울남부·특허법원 법원장을 지냈다. 사법연수원장을 하다가 헌재재판관에 임명됐다. 판사 시절에도 '소수자 보호' 판결을 많이 했다. 서울고법 부장판사로 있던 2004년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지하철 휠체어 리프트를 사용하다 추락해 사망한 사건에서 "도시철도공사가 장애인을 위한 안전장치를 제대로 설치하지 않았다"며 철도공사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1980년대 여성의 고용 환경을 크게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은 이른바 '김영희 사건' 판결도 유명하다. 김 후보자는 여성의 정년 차별 문제가 처음 불거진 한국전기통신공사 전화 교환원 김영희씨의 정년 무효 소송에서 "여성 전화 교환원만 정년이 43세로 돼 있는 것은 남녀 차별"이라고 판결했다. 2008년 대법원은 '한국을 바꾼 시대의 판결' 중 하나로 이 사건을 선정했다.

    판사가 되기 전 그의 삶에는 곡절도 적지 않았다. 서울대 재학 중이던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64일간 구금됐다가 석방됐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사기관의 추적을 받던 선배에게 식사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1979년 12월 군(軍) 법무관 시절에는 광주에서 근무했다. 이듬해 5·18 광주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상무대에서 시신 검시(檢屍)를 했다고 한다. 그는 2012년 인사청문회 당시 "대검에 찔린 흔적이 있는 시신을 나도 직접 봤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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