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 나는 당신에게 빚진 게 없습니다"

    입력 : 2017.05.20 03:01

    '전함 무사시' 탑승했던 日 수병, 전쟁은 日王 책임 日記로 비판
    학자 아닌 일반인으로선 이례적… 信徒에서 市民으로 각성 그려

    산산조각 난 신

    산산조각 난 신

    와타나베 기요시 지음 | 장성주 옮김
    글항아리 | 452쪽 | 1만8000원

    얼핏 보면 이 책은 일제 패잔병의 아홉 달치 일기일 뿐이다. 1944년 10월 필리핀 레이테만에 참전했던 전함 무사시가 침몰했을 때 가까스로 살아남았던 말단 수병 와타나베 기요시(1925~1981). 하지만 그 일기가 일왕의 전쟁 책임을 겨냥하고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어느 태평양 전쟁 귀환병의 수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책의 제목은 '산산조각난 신(神)'. 솜털 보송보송한 16세 소년병이 수염 거뭇거뭇한 20세 청년으로 고향 마을에 돌아왔을 때, 달라진 것은 나이만이 아니었다. 일왕을 숭배하던 신도(信徒)이자 신민(臣民)에서 각성한 시민(市民)으로 변모하는 과정이 이 안에 있다.

    "나라를 지키고 천황 폐하를 섬기는 병사가 되고 싶다"며 농부의 아들 와타나베가 해군훈련소에 입대했을 때가 1941년. 징용이 아니라 자원이었다. 가진 거라곤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 "해군만은 가지 마라, 배 바닥 한 장 아래는 지옥"이라고 어머니가 말렸지만 듣지 않았다. 일념(一念)이 있었다. 일왕이라는 신을 섬기는 순교자의 삶을 꿈꿨던 것이다. 어느 정도였을까. 해병 위한 위안부 시설에 고참과 하사관을 위해 대신 줄을 서 주면서도, 본인은 단 한 번도 가지 않았다고 했다. 이런 고백이 있다. "기왕 천황 폐하께 바친 몸이니 깨끗한 채로 산화하는 것이 더욱 영광스럽다."

    황군은 무적임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는데, 그날이 왔다. 1945년 8월 15일의 무조건 항복. 패전과 함께 죽었어야 한다고 자책하는 와타나베에게, 어리둥절한 상황이 닥친다. 적의 총사령관인 맥아더와 차렷 자세로 사진을 찍은 일왕 히로히토. 신(神) 이상이라고 생각했던 고귀한 존재가, 스스로 조서를 통해 "나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선언하다니. 함께 입대했던 군대 동기들은 모조리 죽고 와타나베 혼자 살아남았는데, 일왕은 전쟁에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듯 행동하다니.

    히로히토를 신(神)이라 믿었던 말단 병사의 각성. 1944년 전함 무사시가 침몰할 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패잔병은 이제 일왕에게 전쟁 책임의 직격탄을 날린다.
    히로히토를 신(神)이라 믿었던 말단 병사의 각성. 1944년 전함 무사시가 침몰할 때 가까스로 살아남은 패잔병은 이제 일왕에게 전쟁 책임의 직격탄을 날린다. /글항아리

    그는 쓴다. "할 수만 있다면 해전이 벌어졌던 현장으로 천황을 끌고 가서, 바다 밑바닥에 질질 끌고 다니면서, 그곳에 누워 있을 전우들의 무참한 주검을 보여주고 싶다. 이것이 당신의 명령으로 시작된 전쟁의 결말입니다. 이렇게 수십만이나 되는 당신의 병사들이 당신을 위해서라고 믿으며 죽어갔습니다."

    히로히토 일왕에게 전쟁 책임을 묻는 책은 정치학자 가미시마 지로의 '근대 일본의 정신 구조'를 비롯해 여러 권 있지만, 대부분은 전문 연구자의 작업. 학자가 아닌 일반인, 그것도 말단 병사가 일왕에게 책임을 추궁하는 책은 유례가 드물다고 했다.

    이 일기의 시점은 1945년 9월부터 1946년 4월까지. 고향 마을로 돌아와 밭매고 나무하며 밤에 썼던 분노와 성찰의 기록이다.

    일본에는 학도병 출신의 일본전몰학생기념회(와다쓰미회)가 있다. 동경대 출신들이 주도했던 이 기념회에서 초등학교 졸업장이 전부였던 와타나베 회원의 임무는 기껏해야 봉투 주소를 쓰거나 우표를 붙이는 작업이 전부였다고 한다. 이 책의 일본 초판은 1977년. 머리가 아니라 땀과 육체로 썼던 와타나베의 일기는 '많이 배운 지식인'들의 위선과 허위의식을 바닥부터 무너뜨렸다. 현학적이고 계몽적인 비판 대신, 진솔함과 체험에 바탕을 둔 깨달음과 자기반성이 이 안에 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 토막을 소개한다. 배신감을 토로하며, 일왕에게 편지를 쓰는 대목. 해군 복무 4년 동안 먹고 입었던 모든 것을 당신에게 돌려주겠다며 리스트를 적는 20세 청년. "양말 한 켤레, 단추 한 개까지 천황 폐하께서 주신 것이니 소중히 여기도록"이라고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빠짐없이 적는다면서 섬세하고 집요하게 하나하나 적는다.

    "동계 전투복 상의(그중 1은 헌옷), 하계용 속바지 3, 양말 4, 각반 1…" 등 나열한 리스트가 모두 56항목.

    "이상이 내가 당신의 해군에 복무하는 동안 받은 금품입니다. 총액 4281엔 5센이므로 우수리를 반올림해 4282엔을 이렇게 돌려 드립니다."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이로써 당신에게 빚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 함께 읽어볼 책

    함께 읽어볼 책 사진들

    ▷'패배를 껴안고'(민음사)

    미국의 대표적 일본사 연구자인 존 다우어 MIT 교수의 퓰리처상 수상작. 미군 점령하에서 패전국 일본이 재건되는 과정을 다큐처럼 추적했다. 와타나베의 일기를 자신의 책에서 10여 쪽 가까이 인용하고 있는데, 국내에 '산산조각 난 신'이 알려지는 데 큰 역할을 한 책. '산산조각 난 신'이 미시사라면, '패배를 껴안고'는 거시와 미시를 가로지른다.

    ▷'사쿠라가 지다 젊음도 지다'(모멘토)

    문화인류학자인 오오누키 에미코 미 위스콘신대 교수의 분석. 일본군국주의와 일왕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수많은 젊은이를 '인간 폭탄'으로 내몰았는가를 심층적으로 분석한다. 전쟁 책임을 일왕에게 물을 수 있을 것인가 여부를 둘러싼 흥미로운 논쟁은 호사카 마사야스의 '쇼와 육군'(글항아리)을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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