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80년대식 이념 권력과 직면한 지식인 사회

  •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사회학

    입력 : 2017.05.20 03:12

    國定 역사 교과서 폐지를 대통령 말 한마디로 결정?
    국정 주장 나오게 된 계기, 위원회 만들어 먼저 살폈어야
    학계마저 진영 따라 쪼개지니 권력이 진리를 자임하는가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출범하자마자 문재인 정부는 국정 역사 교과서를 폐지했다. 청와대는 이를 '상식과 정의 바로 세우기'라고 설명했지만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우선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을 끝내겠다는 발상은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다짐과 어울리지 않는다.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통합 정치의 약속과도 거리가 멀다. 새 시대의 새 정부라면 무슨 직속 위원회라도 만들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역사 교과서 문제의 자초지종을 한 번쯤 진지하게 살피는 게 도리다.

    역사 교과서 갈등의 발단은 지난 2000년대 초 검정 역사 교과서 대다수가 이념적으로 편향되어 있다는 정부 안팎의 문제 제기였다. 그런데 이에 대해 지금까지 단 한 차례, 그 누구로부터도 진정성 있는 회답이나 대응이 나온 바 없다. 말하자면 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쟁 자체가 국가적 의제로 성사되지 못한 것이다. 이번 국정 역사 교과서 폐지는 따라서 기존 역사 교과서의 '신성불가침' 원칙을 재확인한 셈이다. 학문의 자유와 관련된 염려가 커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문 대통령의 국정 역사 교과서 폐기 지시는 1980년대식 역사관과 국가관에 대한 강한 결기를 반영하고 있다. 이는 과거 노무현 대통령이 한국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역사'로 규정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닌 게 아니라 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대한민국의 성공한 역사에 대해서는 함구한 채 역대 대통령들의 '불행'만 언급했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는 원조 (3)86세대에 둘러싸여 있어 아무래도 80년대발(發) 운동권 이념 권력이 역사적으로 재기한 모양새다.

    그러잖아도 80년대 이후의 '문화혁명'은 학문의 자유를 줄곧 잠식해 왔다. 학회 행사가 폭력으로 얼룩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학술적 논쟁의 승패가 정치나 사법에 따라 가려지는 사례 또한 잦아졌다. 어떤 역사 교과서는 전국 모든 학교로부터 일제히 배척당하는 놀라운 기적을 경험하기도 했다. 첨예한 이념 대립 속에 지식인들의 자기 검열 현상도 눈에 띄게 늘었다. 오늘날 진보 담론은 시대정신의 위상을 확실히 굳혔다. 현행 역사 교과서야말로 현 정권 출범의 숨은 공신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의 사회학자 콜린스(R. Collins)에 따르면 학문의 자유는 스스로 지켜지지 않는다. 학문의 자유는 두 가지 사회적 조건이 앞서야 한다. 우선 사회적으로 상당한 수준의 이성과 합리성이 통용되어야 한다. 만약 세상을 미신이나 신화 또는 도그마가 재단한다면 과학으로서 학문은 애당초 입지가 좁다. 또한 지식인들은 동업자로서 강력한 학문 공동체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지식인들이 개별적으로 산재하거나 서로가 서로를 부정할 경우 제도로서 학문은 자력으로 존립하기 어렵다.

    언제부턴가 우리나라 학계는 객관과 사실을 말하기보다 신념과 독선에 깊이 빠져 있다. 진영 논리에 따라 지식인 집단 공동체가 쪼개지고 무너진 지도 한참 되었다. 결국 오늘날 우리나라는 학문의 자유를 지켜낼 수 있는 여건과 체력이 절대적으로 취약한 상태다. 바로 이런 시점에 문재인표(標) '진리 레짐'이 전격 등장한 것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는 한 담론이나 시대정신이 권력이 되거나 거꾸로 권력이 진리를 자임하며 스스로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현상을 진리 레짐이라 불렀다.

    문재인 대통령의 정치적 유전자는 그저께 광주 민주화 운동 기념식에서 뚜렷이 드러났다. 특히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 개헌을 추진하겠다는 발언은 국가의 정체성과 역사의 물줄기를 바꿀지도 모르는 중대 사안이다. 80년대 역사 패권주의의 관점을 이른바 촛불 혁명 정신과 연결하여 대한민국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겠다는 의도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로써 애초의 '통합과 협치' 선언은 벌써부터 진정성이 의심받을 지경이다.

    문제는 문재인 정부의 쾌속 질주에 대한 비판과 견제 세력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니라 국정 동반자나 조언자로서 말이다. 박근혜 정부의 황망한 몰락 이후 보수 정당은 아직도 자중지란이다. 최순실 파동을 거치며 주요 언론은 크게 상처를 입거나 체면을 구겼다. 건강한 시민사회도 사실상 종적을 감췄다. 이제 그나마 남은 것은 지식인 사회의 직업적 양심과 소명 의식일지 모른다. 그것은 철저한 시시비비를 통해 문재인 정부의 무서운 자신감과 놀라운 박력이 국민 모두의 성공, 국가 전체의 승리로 귀결되기 위해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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