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
역사 속 숨은 영웅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조선의 '불량 청년' 박열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역사(歷史)를 배우고 위인전도 읽지만, 길고 긴 역사 속에서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영웅들을 다 알지는 못한다.
일본에 맞서 법적 투쟁을 벌였던 '불령선인(不逞鮮人)', 2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옥살이를 하면서도 끝까지 의지를 잃지 않았던 한 의사(義士)의 이야기다.

  • 구성 및 제작= 뉴스큐레이션팀 오현영

    입력 : 2017.05.29 08:02 | 수정 : 2017.05.30 14:48


    [이규태 역사에세이] 박열 열사 이야기

    박열, 키워드로 보는 이야기

    일찍부터 키운 항일 정신
    박열 의사는 1902년 3월 12일(음력 2월 3일) 경상북도 문경군 마성면 오천리(샘골) 98번지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보낸 마성면 오천리 일대는 일찍이 일본에 의한 광산촌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개 조선총독부의 후원 아래, 일본 자본가들이 마구잡이로 개발한 광산촌에는 조선인에 대한 가혹한 노동착취와 저임금, 인권유린 등의 각종 폐해가 뒤따랐던 만큼, 지역주민들의 반일정서가 광범위하게 형성되어 있었다.

    착취당하는 조선 백성들의 참상을 보며 자란 의사는 다니던 보통학교의 1916년 3월 졸업식을 앞두고 조선인 교사의 고백을 접했다. 그는 교사가 일본의 압력 때문에 거짓 교육을 해온 것에 대해 눈물로 사과하자 이에 충격을 받고, 앞으로 어떤 일이 있어도 계속 공부에 전념해 민족을 위해 큰일을 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나키스트가 되다
    박열 의사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 다니는 치욕을 견딜 수 없다며, 학업을 포기했다. 이후 고향 문경에 돌아간 그는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격문을 살포하는 등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로부터 일본의 가혹한 고문과 탄압 만행을 전해 듣고, 더 이상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1919년 10월 경 일본 도쿄로 갔다. 이후, 온건 노선으로는 조국의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고조되어 당시 박열과 같은 유학생들은 사회주의 운동과 아나키즘(무정부주의·anarchism)*에 관심을 갖게 된다.

    * 아나키즘이란, 조직화된 정치적 계급투쟁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모든 정치적 조직·규율·권위를 거부하고, 국가권력 기관의 강제 수단의 철폐를 통해 자유와 평등·정의와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데올로기·운동이다.

    국가나 정부 기구는 본래가 해롭고 사악한 것이며 인간은 그것들 없이도 올바르고 조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신념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식민지 조선 청년들에게는 민족독립을 위한 행동방식으로 구원의 이념이 되었다.
    (박열의사기념관)

    박열(왼쪽은 젊은 시절의 모습) /국가보훈처

    '최악의 불령선인(不逞鮮人)'
    의사는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김찬, 조봉암 등 도쿄에 거주하는 고학생들을 규합해 의혈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친일 행위자들에게 협박장을 보내 떠나라고 명령하고, 철저히 응징하겠다고 위협했다. 또한 그는 당시 도쿄의 최대 조선인 노동단체였던 조선고학생동우회에서 김약수, 백무, 최갑춘 등과 함께 간부로 활동했다.

    도쿄에서 항일활동을 펼치던 그는 조선 유학생들과 함께 1921년 11월 29일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했다. 일본 아나키스트의 후원 아래 항일투사들이 결집된 흑도회는 세계노동절 행사를 비롯해 일본 사상단체의 반정부 시위에 적극 참여했다. 의사는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를 발간하여 항일세력의 규합과 선전활동에 전념했다.

    1922년, 의사는 직접 행동을 추구하는 회원들과 함께 흑우회(黑友會)를 조직했다. 일본 및 조선의 여러 사회단체들과 함께 연대활동을 전개했다. 조선문제강연회를 열어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한편, 서울과 도쿄의 노동단체들과 연락관계를 맺는 등 활발한 대외 연대활동을 펼쳤다.

    * 불령선인(不逞鮮人):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제 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

    당당하고 거친 외침 '나는 개새끼로소이다'

    시 '개새끼'는 1922년 2월, 일본 유학생들이 펴낸 '조선청년'이라는 잡지에 박열 의사가 기고한 것이다. 일본에게 불량한 조선인이라 불렸던 그의 시는 지금까지 전해지며, 후대의 마음을 울린다.

    영화 '박열'을 만든 이준익 감독은 이 시의 의미를 밝힌 바 있다. "'박열'은 양반의 가랑이 아래에서 오줌을 맞으면서, 똑같이 양반의 다리에 오줌을 누는 개의 모습에 일본 제국의 탄압에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아나키스트였던 자신을 투영시켰다. 단순히 예술적인 시가 아니라, 철저히 아나키즘을 반영한 작품이다"

    "나는 박열과 함께 죽을 것이다" 평생 동지 가네코 혹은 금자문자
    1922년 2월경, 의사는 일본에서 그의 평생 동지이자 아내인 가네코 후미코(금자문자·金子文子)와 만났다. 요코하마 태생인 가네코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성적학대로 제국주의 일본에 대해 반감을 가져온 자유 여성이었다. 도쿄 시내 작은 어묵집에서 조선 유학생들과 교류했던 가네코는 조선 잡지에 실린 의사의 자작시 '개새끼'를 읽고 감동했다. 만나게 된 두 사람은 서로의 사상에 공감했고, 다른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동지로서 함께 항일 활동을 펼쳤다.

    (왼쪽부터) 도쿄 시절의 가네코 후미코, 박열. (오른쪽)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괴사진. /박열의사기념관 홈페이지

    * 가네코 후미코: 그는 자신의 이름을 일본 발음으로 부르지 말고 '금자문자(金子文子)'로 불러달라고 했다. (이 기사에서는 박열의사기념관의 표기를 따라 가네코 후미코라고 표기했다.)

    후에 의사와 함께 일왕 폭살 혐의로 의사와 함께 체포되어 재판을 받던 가네코는 말했다.
    "먼저 나는 가네코 후미코가 아닌 조선인 금자문자임을 밝혀둔다. 내 비록 불우한 가정환경 속에서 자란 것은 사실이지만, 박열을 사랑한 것은 그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혹시 박열이 지은 '개새끼'라는 시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 시를 읽고, 그가 바로 내가 찾던 사람임을 알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바로 그 일, 그것이 그 사람 안에 있음을 알았기에 우리의 사랑은 숙명이었다. 나는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일에 동참하여, 그와 함께 이 법정에 선 일에 대해 추호의 후회도 없다."

    박열 의사와 가네코는 사형선고 전, 혼인서를 제출함으로써 영원히 삶과 죽음을 함께 하기로 했다. 하지만 둘은 각각 다른 형무소로 옮겨져 이별해야 했다.

    일본은 두 사람의 항일 의지를 꺾기 위해 사상 전향 공작을 끊임없이 펼쳤다. 편지 왕래나 독서를 제한, 글 쓰는 것도 방해했으며 전향을 종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23일, 급작스럽게 가네코의 자살 소식이 전해졌다. 자살의 원인이나 방법도 알려지지 않은 타살의 의문 속에, 그녀의 사체는 교도소 측에 의해 서둘러 매장되었다. 이후, 유골은 옛 동지들의 노력으로 비밀리에 박열 의사의 친형에게 전해졌고, 경북 문경 팔령산에 옮겨 묻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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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동대지진, 그리고 학살
    1923년 9월 1일, 대지진이 발생해 도쿄는 생지옥으로 변했다. 일본 내각과 군부는 도쿄 시내와 인근 5개 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출동시켰다. 그러나 지진 피해로 인한 혼란은 심해지고, 일본은 국민의 불만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한국인과 일본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소문을 조직적으로 퍼뜨렸다. 완전 무장한 일본 군대와 경찰은 대대적인 조선인 학살을 자행했다. 또, 소문에 격분한 일본의 일반 국민들도 자경단(自警團)을 조직해 조선인을 무조건 체포·구타·학살했다. 이때 약 6천여 명의 조선인들이 무참히 희생당하고 6천여 명이 검속(檢束)되었다. (관동대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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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덕상 재일한인역사자료관 관장이 입수해 2013년 8월 22일 동북아역사재단 학술대회에서 공개한 관동대지진 당시의 사진들: (왼쪽부터) 자경단의 조선인 학살, 학살당한 조선인 사체, 경찰서에 압수된 자경단의 흉기. /동북아역사재단 제공

    일왕 폭살 계획 혐의, 길고 긴 옥살이
    의사와 가네코, 불령사* 회원들 역시 그해 9월 3일경 보호검속이란 명목으로 검속되었다. 일본 경찰은 이어 '일정한 거주 또는 생업 없이 배회하는 자'라는 명분으로 한 달간의 구류에 처하더니, 곧 '비밀결사의 금지' 위반 혐의를 들어 불령사 회원들을 구속 기소시켜 버렸다. 이런 조치는 의사와 불령사를 오랫동안 감시해온 경찰의 사전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경찰의 취조 도중, 의사의 폭탄 구입 계획 사실이 알려졌다.(이전에 의사는 외국에서 폭탄을 반입할 방도를 논의하거나 직접 제조하려 했던 한편, 의열단의 중요간부인 김한을 만나 폭탄구매을 요청해 폭탄 50개를 반입하려 했다. 잇단 폭탄 반입 실패에 그는 1923년 가을의 일본 황태자 결혼식 소식을 접하고 다시 거사계획을 세운 바 있었다.) 이때부터 일본 정부와 검찰은 불령사를 폭동과 일왕 암살을 꾀한 '대역사건'의 주모세력이라고 비화시켰다 . 검찰은 이듬해 1월 27일 의사 부부의 폭발물 유입계획과 불령사 조직을 연결시켜 이 사건을 '대진재()를 틈탄 조선인 비밀결사의 폭동계획'으로 보도했다. 조선인 대학살에 대한 각계 여론과 조선인들의 들끓는 비난을 모면하려는 일본 정부의 계략이었다.

    * 불령사: 박열 의사와 가네코 후미코가 1923년 4월경 한인 14명과 일본인 5명 등을 규합해 만든 항일운동 단체. 일본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 대중지향적 항일 운동을 전개한 단체라 할 수 있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은 이 단체를 폭동을 계획한 비밀결사로 몰아가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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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열 의사의 재판 복원 /박열의사기념관 홈페이지

    관복 입고, 반말로 재판… 日에 정면으로 맞서다
    의사는 검찰에 기소된 이후, 1923년 10월 24일부터 1925년 6월 6일까지 총 21회에 걸친 신문조사를 받았다. 조사과정에서 그는 일왕을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구입하려 했다고 당당히 밝혔다. 또한 그는 공판에 앞서 재판장에게 죄인 취급하지 말 것과 동등한 좌석을 설치할 것, 조선 관복을 입을 것, 조선어 사용 등 4가지 조건을 요구했다. 일본 사법부는 그의 요구를 일부 받아들였다.

    박열 의사는 조선시대의 관복과, 신랑이 혼례 때 예복으로 입던 사모관대 차림으로 법정에 출정했다.(가네코는 조선 한복을 입었음) 또 재판장은  피고라고 하지 않고 '그편'이라고 부르고 박열은 재판관을 '그대'라고 호칭했다. 실제로 일본 재판 사상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또, 의사는 나아가 미리 써 두었던 '음모론'과 '나의 선언' '불령선인이 일본 권자계급에게 준다' 등의 글을 읽으며 일왕의 죄를 폭로하기도 했다.

    선생과 부인 가네코 후미코 여사의 공판결과를 보도한 <조선일보> 1926년 3월 26일자 기사

    "재판장, 수고했네…"
    日 재판장까지 감동케 한 호기

    일본 정부는 1926년 3월, 박열과 가네코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1주일 만에 특별 감형시킨다고 발표했다. 사형 판결 후에 의사는 미소를 지으며 "재판장,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죽이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라고 했고, 가네코는 사면장을 찢어 버렸다. (두 사람의 이러한 저항 의지에 일본 재판장까지도 감동하여 호의적인 발언을 했다가 파면되기도 했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의사는 독립운동 역사상 최장 기간인 22년이 넘는 옥살이를 해야 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 이후에도 대역 사범이라는 이유로 석방되지 못하다가, 그해 10월 27일 44세의 중년이 되어 석방됐다.

    출옥한 의사를 환영하는 동포들, 출옥 후 동지들과 함께 한 박열 의사(가운데) /독립기념관, 박열의사기념관 홈페이지

    윤봉길·이봉창 등 의사 유해 발굴까지 도맡아
    의사가 석방되어 도쿄에 돌아오자, 조선인 단체들이 앞다투어 그를 지도자로 모시려 했다. 하지만 그는 반공산주의 노선을 분명히 하고 이강훈, 원심창 등 항일동지들과 함께 1946년 1월 20일 신조선건설동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으로 추대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의사는 1946년 백범 김구의 부탁을 받아 3의사의 유해송환 책임도 맡았다. 항일 의열투쟁의 선봉에 섰다가 일본의 형무소 뒷자리에 쓸쓸히 버려진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발굴해 고국으로 보내기도 했다.

    1948년의 김구, 양근환, 박열(오른쪽), 1968년경 대동강변을 배경으로 찍은 박열 의사 /독립기념관, 박열의사기념관 홈페이지
    1949년 일본에서 영구 귀국한 의사는 1950년 6·25전쟁 때, 북한군에 의해 납북됐다. 이후, 1974년 1월 17일 서거하여 현재 그의 유해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하지만 항일 투쟁과 신조국건설에 끼친 공로에도 불구하고, 그의 업적은 남북한 양쪽을 비롯해 고향에서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게 사실이다.

    1989년 3·1절에 의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또한 2003년 12월 팔령의 깊은 산속에 있던 가네코 후미코 묘소는 박열의사기념사업회에 의해 박열의사기념공원 경내로 이장됐다.
    "조선인 돕는 일이면 어디든…" 후세 다쓰지와의 인연

    박열, 전 생(生)을 바친 애국(愛國)


    박열, 후대의 이야기

    박열의사기념관
    (왼)박열의사기념관의 모습. (오)박열의사 기념 추모비. /박열의사기념관

    경상북도 문경시에는 박열의사기념관, 기념공원, 생가가 위치해 있다. 박열의사기념관은 2001년에 박열 의사를 기리기 위한 사단법인 박열의사기념사업회의 창립 현판식을 시작으로 태동했다. 박씨 문중 사람들과 문경시가 생가를 보존하고, 사당과 기념비 등을 세우며 박열 의사를 기리고자 노력해 2012년 10월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기념관은 박열 의사와 부인 가네코 후미코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박 의사의 생가 주변 부지 1만4421㎡에 지상 2층, 연면적 1600㎡ 규모로 세워졌다.

    - 위치: 경상북도 문경시 마성면 샘골길 44
    - 문의: 054-572-3396~3397

    박열 의사 기념관 고향 문경에 개관
     
    영화로 알려지는 박열
    영화 '박열' 스틸컷

    박열 의사는 2017년 6월,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로 극장가를 찾아온다. 이준익 감독은 "20년 전, 처음으로 박열이라는 인물을 알게 되었다.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지만, '이 분은 아주 특별한 분이다'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박열을 재조명한 특별한 이유를 밝혔다.

    "난 조선민족의 대표" 사모관대 입고 재판받아

    * 참고= 박열의사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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